절반의 순례자가 되다
남은 길은 알 수 없고,
되돌아갈 길은 지워졌다
상처가 굽은 자리에
새벽빛이 비치자,
다시 걷는 이유를 찾는다
밤의 무게가 아직 땅에 남아 있어도,
하늘은 먼저 밝아왔다.
완전히 준비되지 않아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 그대로여도,
길은 시작될 수 있다는 듯이.
어제의 방향을 묻지 않은 채
오늘의 첫 빛을
조용히 길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순례길의 새벽은
결심보다 먼저 온다.
무언의 빛이
“여기서부터 다시”라며
길을 비추었다.
몸은 그 길을 믿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길은
언제나 멀리 있지 않았다.
움직이는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고
남은 절반의 길을 나설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하군으로 향했다.
레디고스를 지나,
사하군 마을 입구 근처에는
'철제 순례자' 조형물이 보였다.
거친 금속으로 만들어진 순례자의 모습은
뜨거운 태양과 메세타의 바람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순례자의 강인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사하군에 도착하니,
"아, 절반까지 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메세타 구간에서,
그늘은 거의 없었고 마을은 드물었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풍경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길처럼 흘러갔다.
앞으로도 걸어왔던 시간만큼
그만큼 더 걸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
사하군 도시 중심부로 걸어 들어오니,
산 로렌초 교회가 있었다.
12~13세기에 석재가 부족한
메세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정교하게 쌓아 올린 붉은 벽돌 문양은
사하군만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회 정문 앞에 서 있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동상의 모습은,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인
세마나 산타 때,
행진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세마나 산타'는 부활절 직전 일주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리는
스페인의 가장 크고 중요한 종교 행사이다.
그 동상을 보니,
내 마음속에서도
"절반을 무사히 마쳤다"는
나만의 북소리가 들려 뭉클했다.
마을을 둘러보니,
사하군 도시 건물 외벽에는
순례길의 수호성인인 야고보(Santiago)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순례자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벽화 속, 성 야고보의 따뜻한 눈길은
남은 절반의 여정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생장에서 첫 세요를 받고,
설렘과 두려움으로
피레네 산맥을 향해 내디뎠던
첫걸음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거운 배낭에
어깨끈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했던 초보 순례자가
지금은 걷는 일에 익숙해졌고,
두려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니,
"나는 왜 이토록
서글프고 힘든 순례길을 오르려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막상 길 위에 서니,
그 이유들은 하나씩 힘을 잃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뿐이었다.
그저 한 걸음씩 내딛으면
오늘은 오늘만큼 지나갔다.
내가
이토록 서글프고 힘든
순례길을
오르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순례길은
서글픔을
떨쳐내는 곳이 아니라,
서글픔을 안고도
끝까지 걸을 수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일까?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