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은,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반드시 온다'
인생은 늘 맑은 날일 수 없고,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의 표정을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어제의 고통이
아무리 무거웠을지라도,
밤의 장막은 기어이 걷히고
빛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산마르코스 광장 인근에는
'휴식하는 순례자'라는 동상이 있었다.
순례자 동상처럼,
레온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나는
다시 새로운 길을 향해 길을 떠났다.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알베르게에서 출발하느라
레온을 벗어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마을을 벗어나 지평선으로 향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걷는
인생의 첫머리를 닮아 있었다.
인생은 늘 맑은 날일 수 없고,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의 표정을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새벽의 빛을 마주하며 깨닫는다.
어제의 고통이 아무리 무거웠을지라도,
밤의 장막은 기어이 걷히고
빛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구름이 끼면 낀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모든 날씨를 품고
떠오르는 태양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삶의 모습이다.
찬란한 빛줄기가 내 어깨를 비출 때,
나는 비로소 배낭의 무게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둠을 뚫고,
기어이 붉은 얼굴을 내미는
저 태양처럼.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미처 모른 채...
레온 도시를 벗어나자,
한 마을에는 '푸엔테 엘 까닌'이라는
작은 샘터가 보였다.
메마른 시야를 씻어주고
정신을 맑게 깨어주는 그곳은,
황량한 메세타 구간을 걷는 순례자에게
지친 마음을 잠시 적실 수 있는 곳이었다.
푸르른 청량감을 잠시 느끼고,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어떠한 구름도,
몸을 숨길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오직 붉은 황토와 마른풀들만이
지평선 끝까지 밀려가는 곳,
메세타.
메세타 구간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증발해 버린
'황량한 사막' 같았다.
세상에 오직 나 하나만 남겨진 듯했다.
나의 거칠어진 숨소리,
대지를 두드리는 스틱의 소리만이
이 길에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레온에서 보았던 그 찬란한 빛조차
이 메마른 먼지바람 앞에서는
잠시 빛을 잃고,
오직 ‘지금, 여기’를 딛고 있는
나의 존재만이 선명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햇살 아래,
눈부시게 피워냈다.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뒷모습을 발견했다.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아스팔트 위로,
쓰레기를 주우며 걷는 순례자의 뒷모습은
선명하게 내 심장을 적시고 있었다.
레온 도시를 빠져나올 때,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 걸까.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길에
갇힌 것 같았다.
걸어도 걸어도
도착지는 멀어지고
도착시간이 늘어나기만 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 나타난
축 늘어진 시계처럼,
아스팔트길도,
순례의 시간도,
그리고 내 몸과 마음도,
내리쬐는 태양에,
녹아내리는 치즈처럼
축 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타날 것 같지 않은
도착지를 마음속에 그리며,
터덜터덜 억지로 발을 옮겼다.
걷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태양은 잔인하게 내리꽂고 있었다.
내가 다리가 풀린 듯
터벅터벅 걸으며 휘청거리자,
나를 지나쳐 가던 순례자 부부가
물을 권했다.
한 모금의 물과 따스한 손길에,
살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끝없어 보이는 길을 걸었다.
한 마을에 도착해서야,
내가 예약한 숙소가 있는
마을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 나는,
까미노앱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까미노앱을 믿고 난 후부터,
난 표지석을 유심히 보는 것에 방심했고
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앱 고장으로 길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에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예약을 취소했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면서,
길을 잃을 것에 대한 내 안의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피레네에서 길 잃었던, 험난한 여행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에 들어섰는데,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갈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왼쪽은 철망으로 경계 지어진 고속도로에
차들이 쌩쌩 지나갈 뿐이었다.
주변엔 마을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고,
나만이 들판에 던져져 헤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옥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황량한 들판에 가로막혀 길을 잃고서는,
잔뜩 놀라 뻣뻣해진 심장을 부여잡았다.
혹시 누군가를 발견할까 싶어
소리 내어 울부짖는 슬픈 개처럼,
고삐 풀린 황소가 길길이 날뛰듯
나는 이러저리 뛰어다녔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공포로 바뀌었다.
태양은 그 열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들판을 가로질러도 보고,
되돌아가기도 해 봤다.
철망 건너,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에
소리도 질러 보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차들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포심과 슬픔이 헝클어놓은
내 의식을 다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냉정을 되찾고,
까미노 앱을 다시 다운로드하였으나
여전히 내가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구글맵을 이용해,
오늘 목적지가 아니어도 좋으니
가까운 마을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구글앱은 제대로 작동했다.
5km 넘는 곳에 마을이 있었다.
가슴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솟았다.
거의 9시간 넘게 걸었기에,
한 발짝도 꿈쩍하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러나 철조망 안에 갇혔다가
나올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하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글맵은 까미노앱과는 달리
차로로 길을 안내해주고 있어,
쌩쌩 달리는 차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다.
걸었다기보다는 질질 끌고 갔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알베르게에
전화예약을 했다.
철문처럼 무거워진 내 발을 질질 끌면서,
그 마을을 향해 걸었다.
1시간 넘게 걷고 나서야,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의자에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호스트는 아주 따뜻한 음성으로
괜찮냐고 물으며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아침에,
까미노 앱에서 평점이 높은
두 개의 알베르게를 발견했었다.
그런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알베르게에
나는 지금 와있는 것이었다.
후기에,
이곳 알베르게 호스트가
매우 친절하다고 했다.
그 친절한 호스트 앞에 내가 있었다.
'만날 사람은 어찌 됐든,
만나게 되는 것일까?'
어두운 터널 속을
혼자 걸은 것 같았던 악몽에서,
나는 깨어났다.
함께 저녁식사를 한 캐나다인 두 명이
말했다.
"8개의 베드를 예약한 프랑스인들이
전화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어.
10인실에 너 혼자 자게 될 거야."
저녁식사 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길을 잃고 나서,
그 암흑이 얼마나 가혹했는가.
지옥을 다녀오고 나서,
나는 다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했다.
내 안의 내가 비로소,
시련이라는 빛을 통과해
찬란한 무지개로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가장 행복한 순례자였다.
"인생의 진정한 순간은
춤출 때가 아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인생이었다."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