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하숙'
하늘이 흐리다고
태양이 사라진 걸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단지 내 눈에
잠시 보이지 않을 뿐,
늘 찬연히 빛나고 있다
모닐라세카에서 다정한 하룻밤을 보내고
'스페인하숙'의 촬영지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32km의 긴 여정을 위해
새벽의 정적을 깼다.
하늘이 밝기 직전,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9월 30일.
가을비가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인간의 영혼은 흐릿하게
심연에 갇혀있어
잘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마음 깊은 곳에 갇혀있던 것이
내면의 고요 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걷는 이유가
구름 속에 감춰있는 듯,
설렘으로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폰페라다에 있는 대성당과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템플 기사단 성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두려워 말라.
이 견고한 성벽과 거룩한 빛이
수백 년간 길을 지켜왔듯,
당신의 걸음 또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지키고 있으니.”
폼페라다를 지나
또 한 마을을 지나니,
노랗게 물들인 꽃들이
비에 젖은 내 마음을 환하게 비췄다.
잿빛 하늘 아래서도
제 색깔을 잃지 않은 꽃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태양의 조각들이
땅 위에 내려앉은 듯했다.
오늘 하루는 다채로운 마을과
변덕스레 바뀌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대문 위에서 인자하게 웃던 조각상 부부,
포도 수확 조각상,
그리고 피에로스의 기묘한 벽화까지.
다채로운 마을과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간절히 바라던 목적지는
나타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쳐가는 발걸음 끝에
다시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늘이 흐리다고
태양이 사라진 걸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단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늘 찬연히 빛나고 있다."
태양이 저 너머에서
여전히 찬연히 빛나고 있듯,
내가 걷는 이 길 끝에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또한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걷는 이 걸음이
비로소 나를 완성하고 있음을,
가을비 섞인 숨을 내뱉으며
나는 믿고 있었다.
200,2km 수치가 새겨진 표지석이 보였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벽의 짙은 안개와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언제쯤 끝이 보일까' 자문하며 걷던 시간들이,
이 숫자 하나에 녹아내렸다.
"마치 거친 파도를 뚫고 온 항해사가
멀리서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와 같을까."
마음속에 일렁이던 막막함은
어느덧 찰나의 안도로 바뀌어
발끝까지 번졌다.
아직 갈리시아의 험준한 산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200이라는 숫자가 주는 확신은
그 무엇보다 든든한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의 도착지도,
나를 기다리던 빛도,
그리고 이 길을 끝내 완주할 나 자신도.
안도의 한숨 끝에 묻어나는 공기가,
어느덧 달콤했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에 도착하니,
정말로, 구름 속에 감춰진 태양이
찬연히 나를 비추고 있었다.
비에 젖었던 길은
어느덧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고,
내 마음속 깊은 심연까지
그 따스한 볕이 닿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준 그 빛은,
오늘 32km를 묵묵히 걸어온 나에게
아름다운 축복을 보냈다.
마을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과 수도원이 있었다.
이 성당에는
그 유명한 '용서의 문'이 있었는데,
몸이 아파 산티아고까지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과 똑같은,
사죄의 은총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어
순례자들에게 매우 뜻깊은 장소이다.
오늘 내가 머물 곳은,
이곳 수도원에 맞닿아 있는
시립알베르게이다.
까미노 어플에서 소개하는
알베르게 평점이 별 세 개이고,
후기도 악평이 많아서
순례자들이 꺼리는 곳이었지만,
‘스페인 하숙’이라는 방송에 소개된 후로
여러 명의 20-30대 한국인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록색 문을 통과하면,
체크인 데스크 앞에서
스페인 하숙' 속 유해진님이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세요를 찍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퉁명스런 관리자였다.
그러나 기분 나쁜 감정은 찰나였다.
오늘 하루 길고 고된 여정이 끝나고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었다.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어,
지극히 감사한 하루였다.
하늘이 흐리다고
태양이 사라진 걸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단지 내 눈에
잠시 보이지 않을 뿐,
그것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언제나 그곳에 있다.
끝이 없어 보이던 길도,
우리 삶의 구원도,
언제나 그 너머에서
이토록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밤,
당신의 마음에
별 하나,
놓고 갑니다."
[시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