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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Aug 23. 2024

관찰에는 관심을 담은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관찰이 어려운 이유

'관찰'로 직원 인사까지 한 최재천 교수님


김지수 작가의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평균 나이 72세, 우리가 좋아하는 어른들의 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자기 분야에서 30년 이상 현역으로 일한 우리 사회 어른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김지수 작가의 문제도 좋고, 진심이 담긴 어른들의 이야기도 좋아서 수없이 밑줄 치면서 읽고 있는 책이다.


평소 존경하던 최재천 교수님의 인터뷰도 담겨 있어 재미있게 읽던 중 아래의 글을 만났다.  


인사는 과학이에요. 과학적 인사의 출발점이 뭔지 아세요? 관찰입니다. 다행히 저는 평생 관찰을 하고 살았어요. (웃음) 진화생물학자로 실험실에 가면 가장 먼저 도마뱀 관찰을 시킵니다. 제일 재미없는 동물이거든요. 그늘에 있다가 먹이도 잡고 짝짓기도 하는 그 느리고 느린 과정을 매일 보고 기록합니다. 나중에 그 일지를 보며 중요한 행동을 중심으로 정량화를 하죠.
제가 국립생태원에 있을 때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했어요. 전부는 못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직원들 중심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했어요. 가령 행정만 했던 어떤 직원의 관찰 일지를 보니 꽃을 가꾸고 잡초를 뽑는 행동이 유독 많았어요. 그분을 과감하게 식물관리 연구실장으로 발령 냈더니 입이 귀에 걸려 찾아왔어요. 은퇴하면 이런 일을 하려고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죠. 까맣게 그을려서 신나게 바깥일을 하니 그 즐거움이 조직 전체에 전염이 돼요.

- 동물학자 최재천 인터뷰 중,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김지수


본업이 동물학자이니 평생 동물을 관찰하고 살았겠지만, 인사를 할 때도 직원들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했다니 흥미로웠다. 누군가가 나를 잘 관찰해서 나에게 맞는 직책을 준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다. 그만큼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직장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것이다.  


나는 부하 직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던가를 생각해 보니, 나는 부하 직원을 관찰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글을 쓰다 보니 더 잘 알겠다. 나는 관찰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솔직히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등학교 때 강낭콩 씨가 싹을 틔우는 것에 대한 관찰일기를 쓴 이후, 관찰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글쓰기를 잘하려면 '관찰'을 해야 한다니, 골치가 아프다. 나는 왜 관찰이 어려운 것인가.  



관찰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읽다가, 내가 관찰이 힘든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강원국 작가는 '주목'과 '관찰'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 세대는 '관찰'보다 '주목'을 잘해야 인정받았다고 한다.


세상에는 ‘주목’ 잘하는 사람과 ‘관찰’ 잘하는 사람이 있다. 주목과 관찰은 무언가를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하지만 보는 대상이 다르다. 주목은 남이 보라거나, 봐야 하는 데를 보는 것이고, 관찰은 내가 보고 싶은 데를 보는 것이다.
(중략)
우리 세대는 보라는 데를 잘 보면 인정받았다. 선생님 말씀을 누가 더 잘 듣는지를 놓고 경쟁한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평가받지 않았다.

-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그렇다. 나야말로 선생님이 말하는 곳을 잘 봐서 인정받은 '모범생' 출신이다. 선생님이 하라는 데로 줄 잘 섰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부모님이 하라는 데로 말 잘 듣는 착한 큰 딸로 자랐다. 고등학교 때는 0교시에 나만 졸지 않아서, 선생님이 나를 보고 수업할 정도였다. 내가 보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하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 관찰이 힘든 것은 당연한 일.


여기에 이유를 덧붙이자면 관찰 따위를 할 시간적인 여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일하고, 아이 키우고, 살림하면서 꽃과 나무를 관찰하고 구름의 흐름을 관찰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관찰할 시간은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산책은 어디론가 뛰어가 버린 아이를 잡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아이를 돌보거나, 목마르다는 아이에게 물을 먹여주고, 다리 아프다고 징징 대는 아이를 다독이는 일의 연속이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관찰이라니... 잠깐 하늘 보고 아, 좋다 하고는 끝이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을 가도 한 아이는 더 보고 싶어 하고 한 아이는 그만 보고 싶어 한다. 그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맞춰 주다 보면 '다음에 나 혼자 다시 오고 싶다'하게 된다. 하지만 그 미술관을 다시 방문하게 될 확률은 0%이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니 나만의 시간이 늘어나기는 했다. 게다가 프리랜서로 일하니 일에 대한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홈스쿨링을 하니, 여전히 나만의 시간은 제한적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나의 환경이니.

그나마 생긴 시간적 여유를 활용해 글쓰기를 위한 관찰을 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처음으로 지하철에 승객들을 관찰해 봤다. 그런데, 이놈의 관찰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여기서 무슨 글감이 나온다는 것인지 수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관찰'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관찰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관찰'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사진: Unsplash의 Emiliano Vittoriosi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할 수 없다. 관찰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관찰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강원국 작가는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관찰하고 글을 쓰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진득하게 무언가를 관찰할 시간.


우선 눈앞에 보이는 것을 묘사해 보자. 현상, 현황,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해 보자. 사실대로 현장감 있게 쓰고 의미를 강조해 보자. 사건, 사물을 보이는 대로 쓰고, 사람의 심정, 처지, 사정을 헤아려 쓰고, 현상의 이유, 원인, 전망을 분석해 쓰자. 글은 자신의 시선이고, 관점과 해석이며, 감상이다. 길들지 않은 자신의 날것을 글로 쓰자.

-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그러려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억지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힘드니,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관찰해야 한. 강원국 작가는 <나는 말하듯이 쓴다>에서 보고 싶은 곳을 보고 글을 쓰면 자기 치유가 된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집 고양이들이나, 나의 책상 위 물건들을 먼저 관찰해야 하는 것이었다. 관심도 없는 지하철 승객들을  살펴보려니 관찰이 될 턱이 있나.


보고 싶은 데를 보고 글을 쓰면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우리 뇌는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고, 감정과 표현이 일치하지 않아 힘들다. 자신이 보고 싶은 데를 보고 쓰면 모든 게 일치한다. 주목이 아닌 관찰로 쓸 때 가장 자기답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스스로 알아줌으로써 억울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래서 글은 언제나 자기편이고 자기 자신을 치유한다.

- <나는 말하듯이 쓴다>, 강원국



이쯤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관찰능력은 아이들, 살림, 나의 일에 몰빵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것들이 나의 최고 관심사였으니 최고의 관찰 대상이었다. 특히 아이들. 아이들의 모든 것을 자세히 보면서 관찰해 왔으니,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관찰의 달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말을 잘 못하니 얼굴 표정과 몸짓을 관찰해 아이들을 파악해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의 변화를 엄마인 나는 있었다. 똥을 건지, 배가 아픈 건지, 화가 건지, 슬픈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니 다시 말이 없어진다. 어렸을 때는 말을 못 했지만, 이제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관찰이 필요한 시기가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섣불리 개입하면 안 된다. 시간을 들인 관찰이 필수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을 표정을 관찰해 밤새 잘 잤는지 파악하고, 아이의 말투나 표정을 관찰하며 불만 사항은 없는지 확인한다. 수능공부하는 큰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다독여주고, 한참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둘째 아이의 말투나 행동을 관찰해 훈육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엄마는 몰라도 돼'는 하지는 않아서 너무 다행이다.)


이제 이렇게 몰빵되었던 나의 관찰 능력을 글쓰기에 나눠 줘도 되지 않을까?

 


나의 관찰능력을 글쓰기에도 나눠주자.


그래도 될 시기가 되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 주변의 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지하철의 승객들도 여유롭게 관찰하게 되지 않을까.

"글을 쓸 때도 사랑을 할 때도, 아이를 키우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도, 대상을 알고 이해하려면 얼마의 시간 동안은 가만히 바라보고 기록해야 한다"는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의 김지수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둘 줄 아는’ 최재천의 지혜는 동물에게 배운 것이다. 관찰을 통해서였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섣불리 그 질서에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오래 지켜보는 것.
글을 쓸 때도 사랑을 할 때도, 아이를 키우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도, 대상을 알고 이해하려면 얼마의 시간 동안은 가만히 바라보고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만히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자세를 낮추고 지루함을 견뎌야 비로소 보인다. 생물과 사물이 지닌 그들만의 무질서와 혼돈이, 질서와 아름다움이.
최재천 교수는 그 ‘가만히 바라보기’가 훈련된 사람이다. 그가 동물에게 배웠듯, 우리도 그에게서 배운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선 서로를 관찰하는 데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김지수




표지 사진: Unsplash의 Agence Ollo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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