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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Jun 06. 2023

오일리어

나비 번데기

약을 증량했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여전히(어쩌면 전보다 더) 불안감을 느끼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부는 타는 듯이 화끈거렸고 머리는 납덩이가 들어차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거기에 무기력하고 슬픈 기운까지 더해져 힘이 빠진 채 뱀의 허물처럼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담당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약을 다시 처방받으려면 오전진료시간에 맞춰서 집에서 오전 10시에는 출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알람을 듣고 9시에 눈을 떴다가 다시 약을 처방받는다고 해도 내 문제는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생각에 빠졌다.


오전진료를 받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햇빛을 싫어하지만 의무적으로 그 빛을 받아야 몸이 윤활유를 바른 기계장치처럼 잘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온 것이라 갈 곳이 없었다. 입맛이 없어 밥을 거의 먹지 않은지도 꽤 되었기에 반찬가게에서 몇 가지 반찬을 사면 밥을 챙겨 먹지 않을까 싶었다. 빨간 장미덩굴이 있는 조용하고 작은 정원을 지나 커피전문점 맞은편의 횡단보도의 신호등 쪽으로 가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등을 콩벌레처럼 잔뜩 구부리고 앉아 팔과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흘깃 바라보았더니 트럭에서 마늘을 한 단에 삼천 원에 팔고 있었다. 내 옆에는 검은 망사로 된 소매가 있는 원피스를 입은 붉은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늙은 여자가 서 있었고 그 여자의 발 옆으로 탁한 하늘빛의 리넨 재킷을 입고 비둘기색 중절모 쓴 백발의 남자가 사람들 틈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마늘을 담고 있었다. 그 노인은 눈꺼풀이 살짝 아래로 내려와 우울해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물로 된 회색 작업복 조끼를 입고 무릎을 덮는 카코바지를 입은 마늘장수는 볼록 나온 배를 내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채색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색이 바랜 빨간 모자는 눈에 띄었다.


여러 가지 봄 나물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는 반찬가게의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이장아찌, 김자반무침, 가지나물을 사 왔다. 잠깐 나온 것인데도 등과 가슴이 땀으로 축축했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후 바로 새로 산 반찬들을 꺼내 억지로 밥을 먹었다. 김자반은 너무 비렸고 오이장아찌는 수분기 없이 메말랐으며 가지나물은 밍밍했다. 결국 사온 반찬과 먹다 남은 밥을 모두 버렸다.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한심했고 죄책감이 느껴졌다. 반찬가게에서 반찬 고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장 난 몸을 가진 게 죄스러웠던 것이다.


손가락을 봉합했던 부위가 아직 아물지 않아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지만 발코니에 만든 작업실로 가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이 감정들을 붓질을 하면서 물감을 칠하듯 덮어버리고 싶었다. 마른 붓에 오일을 적시고 파란색 물감과 흰색 물감을 조색해 배경을 칠하기 시작했지만 봉합한 부위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이라 붓을 제대로 쥘 수가 없어 푸른 선이 자꾸만 비틀비틀 삐져나가고 흔들렸다. 더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전에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비참한 감정들은 가슴에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눈앞에서 질퍽질퍽한 개펄에 물이 차오르고 검푸르고 높은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제방을 쌓는 일꾼들과 짚과 모래가 담긴 수례를 나르는 말들이 오가고 있는 것도 보인다. 사람들이 사라진 어두운 밤에 쏟아져 내리는 비를 뚫고 말을 타고 달리는 남자가 나타난다.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내게 이런 환후와 환각이 보이는 것은 태오도어 슈토름의 백마의 기사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면 바다도 함께 내 앞에 펼쳐진다.


나는 다 타버리고 남은 재와 연기를 보고도 한동안 무엇인가를 끝없이 회상하고 빠져든다. 나의 보잘것없는 하루를, 지루하고 무기력한 것들일지라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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