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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로윈 Dec 26. 2019

걷거나 뛰어 다니는 여행

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7)

'핑크 시티' 자이푸르


사기를 당해 가진 현금을 모두 잃고, 비상금을 송금 받아 인출할 수 있는 체크카드도 잃어버린 후 죽을 상이 되어 도착한 도시는 인도 자이푸르였다. 남아 있는 돈을 남은 여행일수로 나눠 보니,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은 이만 원 남짓이었다. 이만 원의 하루 예산은 다음과 같다. 숙박비 만 원, 식비 오천 원, 입장료 등 기타 비용이 오천 원. 그리고 도시 내 교통비 0원.


걷거나 뛰어 다니는 나의 여행은 이때 시작되었다. 없는 건 돈이요, 남는 건 시간과 체력인 나에게 혼자 걷거나 뛰는 것은 공짜니까.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할 정도의 거리는 걸어보자, 고 결심했다.


실수로 인해 발생한 금전적 손실을 의미하는 '멍청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걷기 여행은 주로 이와 같은 멍청비용을 상쇄하기 위한 속죄의 걸음인 경우가 많았다. 버스를 잘못 내려서 몇 정거장을 걸을 때, 사기를 당한 후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걸어갈 때 등등. 때로는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에 목적지에 도착한 후 갈 곳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 무작정 버스 정류장 주변을 걷기도 했다.




자이푸르에서, 걸어서 절약한 대중교통 비용만큼 음료수를 자 마시는 데에 지출한 나는 결국 돈을 아끼는 데 실패했지만, 도시를 걸어 다니는 여행은 확실히 그렇지 않은 여행과 달랐다. 여행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자이푸르의 길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숙소를 나와 라씨를 파는 가게가 있고, 이 광장에 있는 이름 모를 건물이 예쁘고, 그 다음 시장통으로 들어서고 ...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값싼 툭툭도 나에게는 사치였던 때가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읽는 나만의 방식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여행을 다니면 어쩐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도시를 생각하면 몇 개의 산발적인 지점과 장면들만 머릿속 지도에 남아있다. 지점과 지점 사이를 직접 걷거나 느린 속도로 뛰고 나서야 도시의 공간들이 선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혼자 여행할 때에는 걷거나 뛰는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꼭 할애한다. 걷거나 뛰어 다니는 여행은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처럼 추억을 새길 수 있는 방법이다. 펜으로 쉽게 쓴 글씨는 수정 테이프로 덮으면 없어지지만, 온힘을 다해 몽당연필로 공책을 눌러 가며 쓴 글씨는 종이에 자국이 남아서 지우개로 지워도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걷거나 뛰어 다니는 여행은 그런 류의 기억을 남긴다.






또 걷다 보면 때때로 놀라운 풍경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출장을 왔지만 운동을 하겠답시고 무작정 아침에 모스크바의 대로를 따라 뛰었다. 그러다 발견한 성 바실리 성당의 아침 풍경은 단연 최고였다. 루앙프라방에서 아침 산책을 하다가 출출해서 사먹은 시장의 쌀국수만큼 맛있는 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다. 이탈리아 친퀘테레에서 길을 잘못 들어 걷다가 발견한 고양이를 한참 동안 쳐다본 기억도 잊혀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아침의 성 바실리 성당


    우리는 느리게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우리는 느리게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 장기하, 「느리게 걷자」중


걷거나 뛰는 여행은, 멍청함을 속죄하기 위한 기능적 목적의 달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나에게 숨겨진 예쁜 고양이나 오래된 서점,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했던 빵집 같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들이, 여행에 대한 나의 기억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번 짐 가방을 쌀 때에도 운동화는 꼭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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