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는 바다를 지나온 뱃머리에 나부끼는 평화로움
은발의 의미
임현숙
거울 속에서 오래된 나를 만난다
머리카락마다 시간이 쌓여 있다
처음 흰 머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결핍이라 여겼다
사라진 열정, 닳아버린 나이의 증표라고
그러나
빛의 삼원색이 모두 섞이면 하얀빛이 되듯
세상의 빛을 모두 품어
마침내 희게 변한 것이다
색이 바랜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역사가 녹아든 것이다
욕망이 한때 불타올랐던 자리
그 불길이 사그라지고 남은 재
은빛으로 반짝인다
흰 머리카락은
풍랑이는 바다를 지나온 뱃머리에
나부끼는 평화로움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얗게 염색하셨어요?"
"아니요, 순리대로 살려고요."
나이보다 앞서 간 머리카락
감추고 싶어 검게 물들였던 은발
허울의 굴레에서 해방된 오늘
붉게, 노랗게 물든 가을 나무 길 너머
하얀 구름 한 점 한가로이 떠간다.
-림(202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