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11일 칼럼 기고분)
[표지 : 이경진 作 (천안 광덕사 해태상)]
인류는 밤하늘의 별자리에 이야기를 덮어 씌우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무언가로 형상화하거나 빗대기를 좋아했었나 봅니다.
‘사랑’하면 심장 모양의 하트가 떠오르는 것처럼, 오래 전의 인류는 ‘법'란 말이 있기도 전에 '정의'란 가치를 구체적인 인격이나 사물로 형상화하게 되었는데, 서양에서는 '정의의 여신'이, 동양에서는 상상 속의 동물 '해태(해치)'가 법이나 정의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법과 관련된 공공기관의 로고를 보면 ‘저울을 든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신화 속에 등장하던 ‘정의의 여신’ 디케(Dike) 또는 아스트라에아(Astraea)를 본뜬 것입니다.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은 공평무사함을, ‘칼’은 법집행의 준엄함을 의미합니다.
디케는 황금시대에서 은의 시대를 거쳐 청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세상에 남아 그들과 함께 살았으나, 인간들의 타락이 극에 달하자 하늘로 올라가 처녀자리가 되었고 그 후로 그녀가 선악의 판단 도구로 삼았던 저울도 하늘로 올라가 천칭자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디케는 후대 로마시대에 유스티티아(Justitia)로 불리게 되면서 오늘날 ‘정의’를 뜻하는 단어는 ‘저스티스(justice)’가 되었습니다.
법(法)이란 한자의 기원에 관하여, ‘물(水)처럼 흘러가는(去)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소개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한자풀이도 틀리는 것이 아니지만, 원래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 수 ‘水(氵)’, 해태 치 ‘廌’, 갈 거 ‘去’ 세 글자가 합쳐진 글자가 세월이 지나면서 氵와 去의 합자인 ‘法’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며 언제나 평형상태를 이루는 물(水)은 법의 공평함을 의미하고, 시비와 선악을 가릴 줄 안다는 전설의 동물 해태(廌)는 정의를 상징하며, 去는 악을 제거하는 응징적인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강제성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해태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오래전 중국의 ‘이물지’란 책에 따르면 “뿔이 하나에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어뜯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이 같은 속성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의 상징이 되었고, 현재도 공공기관 곳곳에 해태상이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법조인이던 오세훈 변호사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서울시의 상징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디케 또는 유스티티아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이집트·그리스·로마시대를 거쳐 면면히 내려져 오는 ‘정의’라는 관념이 인격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저울질을 하는 주체는 여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다만, 인간은 ‘내가 디케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정의의 관념에 입각하여 공평무사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의 결과에 따라 엄정히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해태는 불을 삼켜먹는 동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지난 2월 숭례문 화재가 광화문의 해태상이 이전되는 바람에 관악산의 불기운을 잠재우지 못해 생겨난 일이라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래서 지난 4월 국회에 해태상 한 쌍이 추가로 건립되었다고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최근의 상황을 보면 해태는 오히려 촛불을 휘감으며 불의 화신이 된 듯한 인상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 2009년 말쯤이면 광화문 해태상도 원위치로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민심의 흉흉함은 해태상이 돌아오느냐 마느냐에 달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어차피 해태는 돌덩이가 아니라 민초들 마음속에서 태어난 동물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결국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맘 속에 잠자던 해태를 다시금 깨워 불러내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