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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Oct 10. 2023

숙소에 왔는데 숙소가 없어요

03. 반갑이와 셰프샤우엔

수상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젊은 호객꾼과 기사가 모는 봉고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밤은 어둡지 창문은 다 가려져 있지 우리가 긴장한 게 보였는지 호객꾼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어느 어느 도시에 갈 거야?”

“셰프샤우엔은 작고 안전한 파란 도시야. 걱정 하나도 안 해도 돼.”

“나는 미국에서 영어를 배웠어.”

“한국말로 nice to meet you는 뭐야?”

“나는 이 도시 정말 사랑해. 여기 방문하는 사람들이 전부 잘 있다 가면 좋겠어.”


1초도 입을 다물지 않으며 우리를 안심시키던 그는 곧…


EDM을 틀었다.



봉고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전자음의 엇박자를 가르며 박수를 치고 목청껏 ‘반갑습니다’를 외쳤던 반갑이.

이름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그냥 반갑이라 부르다 그 친구의 본명을 잊어버렸다. 미안해.


반갑이는 숙소까지 추천해 주려 했지만 우리가 미리 예약한 숙소가 있거니와 아직 경계심을 완전히 풀기는 어려워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드디어 무사히 숙소까지 도착. 그렇게 즐겁게 놀아줘 놓고 바가지도 씌우지 않던 고마운 반갑이.



택시비를 내고 연신 고맙다 하며 숙소로 들어갔는데 뭔가 이상했다.

호텔 주인이 누가 봐도 ‘오늘 내 숙소에 예약이 더 있다고?’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것.


숙소 예약자 명단에 우리가 없었다.


예약 담당이었던 친구가 카운터에서 얘기 중이었고 캐리어를 들어 주러 같이 들어왔던 반갑이도 싸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통역을 도와주러 다가왔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무슨 일인지 알아보다 마침내 깨달은 사실, 숙소가 예약이 안 되어 있었다.

이 숙소로 예약하자고 일행 둘이서 먼저 얘기를 마친 후 예약 담당 친구가 그 날 밤 예약을 하기로 했는데 그대로 잊어버린 채 예약을 한 줄 알고 모로코까지 날아와 버린 것.


당일 예약이라도 잡으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하필 그날 밤 숙소가 만석이었다.


어쩐지 여행 전날에 숙소 예약한 내역을 한번 다 보여 달라 하고 싶더라니. 안 그래도 숟가락 얹어 가는 여행에 잰 체 같을까봐 조용히 있었던 게 아프리카에서 숙소가 사라지는 참사를 불러 일으킬 줄이야.

그 때 나는 출발 날짜를 하루 늦은 날로 착각해서 “우리 내일 몇 시에 (공항 가러) 만날까?” 하는 질문을 “우리 내일 몇 시에 (밥 먹으러) 만날까?”로 알아듣고 속으로 모레 여행 같이 가는 데 왜 굳이 밥을 또 먹으려고? 하기도 했더랬다. 뒤늦게 돌 깨는 소리를 내며 그날 밤 플랫메이트들에게 나 내일 여행 간다고 통보했던 이력.

그래선지 이 친구의 허당짓이 무척 위로가 되었다. 나만 바보 아냐.


출발일 착각하고,

비행기에서 시킨 도시락 못 받고,

시외 버스 잘못 타고,

숙소 예약 잊어버리고,


매일 매일이 우당탕탕이기 그지 없어서 당장 잘 곳이 없어 막막한 중에도 이거 나중에 어떻게 다 쓰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


하지만 우리에겐 반갑이가 있었다.


숙소로 오는 길에서도 내내 적극적으로 자기 지인 숙소를 영업했던 반갑이였기에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선택권도 없었다.

부킹닷컴에서 주위 숙소를 한번 훑고 일단 그렇게 추천한다는 숙소, 가 보기라도 해 보자 하는 마음에 다시 EDM 봉고에 올라탔다.



그렇게 도착한 새 숙소는 블루라이트로 눈이 부신 곳이었다.


자신 있게 우리를 안내한 반갑이는 주인장을 부르고 우리에게 옥상 테라스도 보여 주며 구경을 시켰다.

그러더니 내려가서 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어 갔다.


아마도 생각했던 방이 이미 예약이 된 듯했다.

준비된 다른 방도 없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우리를 보며 괜찮다고 야경 구경 하라던 반갑이의 프로 정신.



주인은 반갑이와 한참 얘기를 나눈 뒤에 결국 1층 카운터 옆 방으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싱크대도 있고 화장실도 딸려 있지만 누군가 쓰던 흔적이 있는 게 아직 예약을 받거나 할 생각이 없던 방처럼 보였다. 가구에 씌어져 있던 천을 걷어 내고 주섬 주섬 정리를 하더니 이 방이라도 괜찮으면 아주 싼 가격에 해 주겠다고.


지저분하고 정리도 안된 방이었지만 킹사이즈 침대에 4인용 소파까지 딸려 있어 자는 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하룻밤만 묵을 거고 시간도 늦었으니 다시 EDM 봉고 타고 다른 숙소로 갈 바에야 여기서 자자며 밥값보다 저렴한 이 스위트룸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슬슬 봉고 기사에게 차비를 지불하려 하니 갑자기 또 이 사람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는 것.

아 반갑이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건가 했더니 반갑이가 호다닥 달려 와서 기사를 데리고 나가 뭐라고 하더니 얼마만 달라고 가격 조정을 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정신 차리니 배가 고파졌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지만 낮에 눈을 뜨는 모로코는 아직 문 연 곳이 있을 거라 믿는다고.


블루라이트로 빛나는 복도를 다시 지나고 셰프샤우엔에 도착한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드디어 이 도시를 제대로 만나는 순간, 어두워서 흐려진 빛깔에도 건물마다 칠해진 하늘빛이 고왔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 밑에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이 나와 먹거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8시만 넘어도 적막해지는 영국과 사뭇 다른 모습.


최대한 밝고 큰 골목만 다니며 뭘 먹을지 탐색하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 둘 셋쯤이 주문을 하고 있는 케밥 가게를 발견했다.

케밥 가게에서 마르게리따를 주문하고 기다리다 감자 튀김 냄새를 맡고 그것도 시켜 버리기. 셋이 나란히 서서 멍하니 피자를 기다리는데 몸은 축 늘어졌으면서도 정신은 번뜩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잘 곳이 마련되고 긴장이 조금 풀린 데다 조금 있으면 배도 채울 수 있으니 이 시간도 재미가 있고. 오븐의 기름 냄새도 좋고.

따끈한 피자 박스를 들고 요거트를 사 가면서 걸어가는 동안 먹는 감자 튀김도 맛있고.


역시 사람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마르게리따를 시켰는데 마르게리따가 아닌 것 같은 이 기분.

맛은 끝내줬다.


탕헤르에서 셰프샤우엔으로 이동 한 번 했을 뿐인데 4시간이 이틀처럼 지나갔다.

모로코 여행을 결정하면서 여태까지 해 왔던 여행과는 많이 다를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모든 순간이 이렇게 촘촘하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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