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오래전 한 TV 방송에서 남아와 여아가 부모의 슬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테스트했던 적이 있다. 대상은 4~5세쯤 되는 아이들이었는데 엄마가 너무 슬픈 듯 얼굴을 감싸고 우는 척할 때 딸과 아들의 반응은 극명히 갈렸다. 여자아이들은 엄마에게 다가가 왜 그런지 묻고 위로하고 마침내 자신도 함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반면 남자아이들은 뒤를 한번 쓱 돌아보고 엄마를 확인하더니 이내 자신이 하던 놀이에 집중했다.
당시 몇 명을 대상으로 했었는데 모든 아이들이 같은 식이었는지 변수가 있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비슷한 나이였던 우리 아이를 보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일반적으로 남아, 여아의 기질적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 아이는 항상 보편적인 남아 같지는 않은 편에 속한다. 더 어렸던 시절에 비하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은 약간 무심해진 면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 세밀한 부분이 많다. 같은 맥락에서 나의 기분 상태도 잘 챙겨주는 편. 내 얼굴에 평소와 다른 감정선이 보이면 여지없이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묻고 나름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며칠 전이었다. 집필 중인 책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때였는데 여지없이 내면의 복잡함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무렵 아이가 내 표정이 밝지 않다며 이유를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고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고 너는 아이'라는 식으로 나누지 않고, 부모의 상황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화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나는 평소에도 아이에게 자주 고민 이야기도 하고 좋은 해답을 얻기도 한다. 유대인들의 교육법을 보면 대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유대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고 한다. 어른들의 대화와 아이와의 대화도 구분하지 않는다. 대화할 때는 아이와 어른이 동등하게 열린 관계가 된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부모의 이런 태도를 보며 자라는 아이가 의사소통 능력, 관계 맺기를 잘할 것이란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평소에도 시시콜콜 내가 하는 일, 그 안에서의 고민들, 노력과 다짐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인 나는 그날 밤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지금 책을 쓰고 있잖아. 그런데 요즘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고민이야.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엄마가 이 책을 쓰는 목적, 그러니까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는 다른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엄마가 너를 키우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 실천해오고 있는 것들에 대해 들려주는 게 정말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읽으며 공감해줄까? 진짜 필요한 이야기 맞을까? 이런 고민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딱 한 문장을 말했다.
"엄마, 엄마는 아이를 참 잘 키워."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 한 마디 안에 응축된 수많은 말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세상에 아이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어본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좋은 부모님, 존경스러운 부모님, 훌륭한 부모님, 그 어떤 찬사보다 나에게는 강력한 위로이자 힘이 되는 문장이었다.
아이로부터 답을 얻고 고민을 해소했으니 이제 웃을 차례.
"잠깐만, 고맙긴 한데 그 말은 곧 네가 잘 자랐다는 말인 거잖아. 너 혹시 밖에 나가서도 이렇게 잘난 척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엄마는 너의 잘난 척 받아줄게!"
어이없어하는 아이와 그날 밤도 깔깔거리며 즐겁게 마무리.
여전히 집필 중인 나는 글이 막힐 때마다 아이의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오늘도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