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마다마다 그리움이 될 테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편이다.
아니 '좋은 편'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굉장히 좋다.
남편에게 종종 '다음 생에 당신과 다시 결혼한다면 절반은 시댁 식구들 덕분'이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시어머니와, 갈등은커녕 이토록 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다는 점이 큰 몫을 차지한다.
(지금은 '우리 아이를 만나기 위해 당신과 꼭 다시 결혼해야 한다'로 바뀌었지만. ^^)
우리 시어머니는 쿨한 시어머니의 표본을 그대로 보여주는 분이다.
결혼 후 12년 동안 우리 집에 딱 3번 오신 게 대표적이다.
그 정도면 무심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만에.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복날이라며 삼계탕을 끓여서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고 가실 정도로 무심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주말이라 집에 아들, 며느리 다 있었는데도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하셨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우리 집에 볼 일이 있어 오실 때면 늘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하시거나, 경비실을 소통의 창구로 택하셨다. 며느리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딸 집에도 가지 않으신다.
오죽하면 자식들이 나서서 제발 그 정도까지는 하지 말아 달라 읍소할까.
독일로 가기 전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밑반찬이 넘쳤다. 아이를 봐주시느라 우리 집에 거의 살다시피 한 친정엄마가 살림을 거의 해주신 이유도 있고, 빠짐없이 꼬박 2주에 한 번씩 시댁에 들를 때마다 어머니가 반찬을 바리바리 챙겨주신 이유도 있다. 당시 맞벌이에 우리 부부가 집에서 밥을 먹을 시간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 반찬들은 대부분 다 먹지 못하고 버려질 때가 많았다.
그 문제로 깊은 고민도 했었다. 어머니 정성과 고생을 뻔히 아는데 처분할 땐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이제 그만 해달라고 할까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반찬을 챙겨주면서 행복하시는 표정 때문이다. 역시 맞벌이하는 둘째 시누이가 어머니가 싸주는 반찬을 거절할 때마다 어머니 얼굴에 드리운 서운함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 살이 동안 나는 엄마표 반찬이며 시어머니표 반찬들이 너무 그리웠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우리 집 냉장고는 반찬들로 들어차겠지, 행복한 상상도 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달라진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부모님들은 그 사이 너무 연로해지셨고 당신들 식사를 챙기며 사시는 것도 힘든 나이가 되셨다는 것을. 양가 부모님 중 가장 건강하고 젊으신 친정 엄마는 여전히 반찬들을 챙겨 지하철 타고 40분 거리인 우리 집에 어쩌다 가끔 들르시지만 집도 멀어진 데다 체력적으로도 예전만 같지 않아 몇 해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어제, 김치찜을 만들다가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독일에 있을 때 그리웠던 시어머니표 음식 중 하나다.
코로나 상황으로 못 가게 되는 기간이 훨씬 많았지만 귀국 후 몇 번 시댁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예전처럼 직접 음식을 해주시는 대신 사 온 음식과 반찬들을 내놓으셨다. 직접 만드신 밑반찬을 챙겨주는 대신 마트에서 장을 봐온 채소며, 과일이며, 심지어 평생 당신이 외면하고 사셨던 레토르트 음식들까지 장바구니 가득 넣어주셨다.
사정 모르는 우리 아들은 "할머니네 집은 공짜 마트 같아!"라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 눈물이 났다.
전보다 기력이 많이 쇠하시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그래도 아들 며느리 빈손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부러 더 그러시는 걸 아는 까닭이다.
부모님 그늘 아래 사는 게 우리에게 앞으로 얼마 큼이나 남아 있을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담가준 김장김치 한 통을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태 못 먹고 간직하고 있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매년 엄마에게 시어머니에게 김치를 얻어먹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목이 탁 매었었다.
몇 달 남았지만 올해 김장할 때는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 말라고 해도 안 하실 분들이 아니니...)
엄마가 준 김치로 시어머니의 대표 음식인 김치찜을 만들다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날들이 많아지겠지. 이런 감정이 깊어지겠지. 음식 마다마다 그리움이 될 테지.
다음에 양가에 갈 수 있을 때 김치찜을 만들어 가야지,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