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주말에 산에 가자!"
좀처럼 제 입에서 먼저 나오지 않는 말에 남편이 놀라더군요.
지난주, 하루 반을 꼬박 침대에 누워 지내고 난 후 '다시'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다시'라고 쓰는 까닭은, 늘 반복되는 패턴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는 '다음다음'으로 미루다가 몸이 아프면 건강을 챙기고 나를 돌봐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 것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그 강도가 약간 더 셌던 것이, 회복력이 갈수록 더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쉬었다 생각하고 약효를 볼 시간이 됐는데도 몸은 여전히 괴로운 상태더라고요.
당연한 일이겠죠. 노화는 하루하루 더 빠르게 진행될 텐데, 그 몸을 돌보는 일은커녕 오히려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도 스스로를 자신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디 몸만 그렇겠어요. 마음도 마찬가지겠지요.
지난주 누워 지내는 시간 동안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서 읽었던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지금 조금씩 아픈 게, 고통이라 할 만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이 문장의 앞뒤 배경은 나병 환자들의 이야기인데요, 그들의 몸이 더 심각하게 망가지는 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고통이라는 감각을 잃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이렇게 예를 들고 있는데요, "손가락이 타 들어갈 때까지 불붙은 성냥이나 담배를 쥐고 있거나, 뜨거운 다리미를 건드리기도 했고, 칼날이 손바닥을 베어 들어가도 모른 채 날카로운 물건을 계속 쥐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발에 구멍이 나도 그대로 신고 다니는 바람에 상처가 생기고 감염이 되어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것까지가 자아라고 한다면, 말단 부분의 감각이 없어진 나병 환자들의 자아는 손이나 팔 혹은 다리만큼 줄어드는 셈이다."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몸과 마음에 찾아오는 고통,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러나 몸과 마음이 깨어 있어서 아주 작은 고통이 왔을 때 알아차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오래 방치하여 고통이 일상화된다거나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상태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