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불문한 수평적 관계, 다양성의 존중을 토대로 어떤 토론도 가능
토론이라, 어려운 단어죠. 단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토론'이 담고 있는, 담아내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렵죠. 토론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100분 토론' 같은 게 떠오르는 걸 보면 어렵고 심오한 주제, 쟁쟁한 실력자들, 불꽃 튀는 설전,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기나긴 과정(기본 100분!!) 등등을 우리는 '토론'이라고 편협하게 배우고 인식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것을 제외하곤 우리가 아는 토론만이 진짜 토론이 맞는 걸까요.
나의 학창 시절에는 솔직히 토론이란 것 자체가 없었죠. 토론이 다 뭡니까. 초등학교 때 손 들고 발표하는 정도(그것도 아주 단답형의, 그저 손 드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차원의 질문) 했으려나요.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갑자기 개인 혹은 팀 프로젝트로 결과물 만들고 발표하고 그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과 답이 오가는 수업들을 하면서 '멘붕'을 경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에서도 진짜 토론이 이뤄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학생이든 교수님이든, 반론을 제기하는 상황이 있었어도 그게 제대로 된 토론으로 진지하게 연결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요즘 학생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토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독일에서 자라며 교육받는 우리 집 아이를 보면서부터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이미 독서토론이니 토론 논술이니 하며 한국 사회에서 중요해진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어렸던 탓에 토론의 영역까지는 관심사가 아니었죠. 앞서 말한 '토론'에 대한 편협한 인식도 있었던 데다가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다수의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토론'은 최소한 초등 고학년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고요.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주제를 이해하는 문해력을 바탕으로 주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추고 논리 정연하게 자기 생각과 의견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하니까요. 자 그런데 말이죠. 바로 이 지점에 우리가 여태 생각해온 '토론'이라는 것의 허점이 있는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면 토론이라는 것은 문해력, 배경지식, 논리, 표현력, 자신감 등 그 모든 능력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난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들을 만들어나가는 아주 기본적이고 사소한 것부터 시작되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는 것이죠. 아이가 저학년이라 알지 못했을 뿐 이미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아이는 많은 시간을 자기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친구들 모두 각자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배우며 제 나이에 맞는 방식의 토론식 수업을 하고 있었음을 나는 후에 알게 됐습니다.
독일식 교육법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독일 아이들은 왜 다들 말을 잘하지? 어른들과 대화할 때 어떻게 이렇게 주저 없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주 초보적인 질문은 독일식 토론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호기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알게 된 청소년 혹은 대학생들과 어쩌다 대화할 일이 생기거나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화법이며 거침없이 의견을 내놓는 태도 등에 놀랐습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이 물으면 재잘재잘 그렇게도 자기 할 말을 잘하더군요.)
한 번은 한인 교포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를 왔는데 당시 의대 진학을 앞둔 아들이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과 뜨거운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 더 세게 불거진 부르카(이슬람 여성들이 머리부터 발목까지 덮어쓰는 옷) 금지를 둘러싸고 서로의 생각 차이를 정말로 치열하게 말하더군요. 솔직히 남편과 나는 저러다가 부모와 아이가 싸우고 끝나는 거 아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놀랍게도 열띤 대화 끝에 또 화기애애하게 식사하며 일상의 대화를 하더라고요. 다른 가족도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른(부모)의 의견에 한마디 한마디 반박에 재반박을 하며 본인 의견을 피력하던 그 친구를 보며 나는 참으로 그 장면이 신선하다 느꼈습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가정에서라면, 글쎄요, 좋게 마무리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네가 뭘 안다고?" / "어른이면 다 옳은 거야?" / "시끄러워, 어린 애가 예의도 없이!" / "이러니까 내가 아빠랑(엄마랑) 대화를 안 하는 거야!" 정도의 말들이 오가지 않았을까요.
그 자리에서 내가 물었어요. 원래도 집에서 그렇게 가족들끼리 밥상머리 토론이 벌어지냐고. 그 친구(아들)가 답하더군요. "저희 집은 치열한 편도 아니에요. 제 친구들은 우리 가족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토론하는데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진짜 심하게 정치 문제로 논쟁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기억도 있어요." 그러고도 그 집 식구들 괜찮았냐고 재차 물었죠. 그랬더니 또 이러더군요. "당연하죠. 저도 친구들도 다 무슨 상황에서든지 얼굴 붉힐 정도로 심하게 논쟁하거나 토론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그걸로 끝이에요. 다들 각자 자기 의견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외려 그런 질문을 하는 나를 이해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루아침에 그런 태도가 길러질 리 없겠죠. 정색하고 고학년 때부터 '자 이제 토론 수업하자'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죠. 배경지식이니 논리 정연한 화법 등은 그렇게 뒤늦게 길러질 수 있을지 몰라도 토론과 논쟁 자체가 일상화된 삶은 어렵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였어요. 나이 불문하고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각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하는 건강한 토론 말입니다.
독일 교육의 목표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 기본이 바로 자기 생각과 의견을 만들어낼 줄 알고 토론할 줄 알고 상대의 전혀 다른 의견도 수용할 줄 아는 태도를 만드는 것이었던 겁니다.
도대체 독일 아이들은 어렸을 때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건지, 그간 이론을 통해서만 보던 현실이 아닌 바로 눈 앞에 앉아있는 한 학생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이어서 공개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로 깨달음이 많은 시간이었다는 점을 부연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