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질문이었지만 평소에도 워낙 그런 식의 대화가 잦은 터라 이상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이렇게 답했죠.
"나라면... 그걸 가려놓고 전시물처럼 입장료 받은 후 관객들에게 보여줄 거야."
나름 자신만만한 답이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돈을 버는 최적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얼른 아이가 감탄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 그건 예로 나오는 답이야."
으응? 예라니? 이건 무슨 이야기?
듣고 보니 이랬습니다. 아이 학교의 영어 시간에 로알드 달의 'James and giant peach(제임스와 슈퍼 복숭아)'를 같이 읽었는데 책에 나오는 '슈퍼 복숭아로 돈을 벌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각자 생각해 다음 시간에 발표하라고 했다더군요. 한데 책 중에 나오는 '방법'의 예가 바로 저와 같은 아이디어였던 거죠(책 속에서는 욕심쟁이 고모들이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표를 팔았다고 하네요).
"와 재밌는 수업이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좋은 아이디어 생각났어?"
"어 나는 일단 반을 잘라서 연구용으로 팔 거야.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내가 먹고 씨앗을 다시 심어서 다시 복숭아를 키울 거야. 그리고 다 자라면 또 반만 팔고 반은 내가 먹고 씨를 심고..."
연구용으로는 팔지 말고 기증하면 더 좋지 않아? 그걸 반을 너 혼자 다 어떻게 먹어? 씨앗을 심는다고 그 정도 크기의 복숭아가 다시 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논리적(물론 논리까지 충분했다면 좋았겠지만) 사고를 훈련하기 위한 수업이 아니라 창의적 생각이 필요한 수업이라는 것을 간파한 때문입니다.
"오 네버엔딩이네? 그럼 넌 계속 복숭아도 배부르게 먹고 돈도 엄청 많이 벌 수 있겠네? 좋다~"
아이의 생각을 '과하게 몰입한 척' 칭찬해주고 덧붙였습니다. 친구들은 어떤 아이디어를 내는지 나중에 꼭 얘기해달라고, 너무 재밌을 것 같다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 듣기로 친구들은 '복숭아 호텔을 만들겠다' '복숭아 파크를 만들겠다' '복숭아 성을 만들겠다' 등등의 아이디어를 발표했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대답도 대답이지만 나는 이 수업 방식 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을 만들고, 그걸 다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능력.
사실 베를린에서 아이가 학교를 다닐 당시 나는 '학교가 아이들의 생각을 이런 식으로 키울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끊임없이 아이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 생각을 표현해내는 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딱딱한 방식의 수업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뜻밖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실 위의 복숭아 예처럼, 대놓고 생각하고 표현하라,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대단히 직접적인 방식이죠.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2019년 초, 당시 2학년 2학기이던 아이의 미술 작품 전시회였습니다. 매 2학년들이 해마다 치르는 학년 말 오픈 행사로, 카페테리아에 모든 2학년 아이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전시하고 학부모들에게 선뵈는 자리였죠. 이미 그 행사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별로 기대가 없었어요. 가서 아이에게 잘했다고 격려해주고 돌아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시를 둘러보기 전 교장 선생님은 모든 학부모들을 한 공간에 불러 모았습니다. 이번 전시의 취지, 감상하는 방법 등등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교장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멘트에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미술 교육은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각각 다른 형태의 결과물로 만들어냈는데요, 다시 그 결과물에 대해 언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의도가 있는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등등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부모님들은 감상만 하시는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해주셔야 합니다."
미술 교육은 창의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결과물이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생각을 다시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는 지점에서 그동안 내가 알던 세상이 그 경계를 확장해 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Grade2 Exhibition에서 인피니트라는 추상화를 선보인 아이.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에 가니 아이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작품 앞에 서 있더군요.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질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만들어내는 부모들 쪽이 더 당황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날 '인피니트'라는 제목의 개인 추상 스케치 작품을 전시한 아이는 많은 부모로부터 작품의 의도며 발상, 표현 방법 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아이는 사실 독일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는 달라졌습니다. 교장선생님의 말씀대로 미술 교육의 목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그 표현, 그리고 언어를 통한 자신의 생각 발표로 이어지는 것이라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도 않고 평가의 기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업이 아니라도 아이들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반에서 문제가 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에 관한 논의를 다 같이 해서 방법을 찾아가기도 했고,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선생님이 제재를 가하거나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무엇을 배우는지 등에 대해 학부모들에게 오픈하는 행사에서는 아이들 각자가 '가이드'로 분해 부모와 함께 자신이 직접 짠 동선과 커리큘럼대로 학교와 수업 내용 등을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죠. 학교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스케줄과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는 '가이드 투어'는 부모 입장에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의 학교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가족 중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가 있는데요. 그 아이가 얼마 전 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친구들이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발표를 잘하느냐고 물어봐. 나는 그냥 내 생각을 말하는 거거든. 그게 틀릴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틀렸다고 하면 아 그런가 보다, 하면 되니까. 그런데 친구들은 그럴 때 부끄럽지 않으냐고, 어떻게 그렇게 잘 이야기하냐고 신기해하더라. 독일에서는 다 나처럼 하는데, 내가 독일에서 학교를 다니다 와서 그런 건가 봐."
마지막 대목에서 씁쓸하더군요. 학교가 어떻게 아이들의 (지식이 아닌) 생각을 자라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