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기 주관을 만들어가는 게 독일 교육이죠
영국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서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 사람을,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독서와 토론, 글쓰기의 중요성이야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죠. 이 세 가지는 사실 각각 존재하다기보다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독서를 통해 높은 문해력을 갖추고 책에서 얻은 다양한 배경지식과 사고력을 바탕으로 토론을 잘하는 이들은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정리해내는 기술도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얼마 전 토론대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조카를 보니 1, 2차 예선 통과 과제가 모두 '글쓰기'더군요.)
지난 글에 등장했던, 의대 진학을 앞두고 있었던,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던 독일 교포 2세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중점을 뒀던 부분은 사실 저 세 가지 독서와 토론, 글쓰기 중 토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세 가지가 다 맞물릴 수밖에 없더군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개인적인 디테일한 질문과 답도 포함돼 있어서 전부를 다 공개하긴 어렵지만, 독일 학교에서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체적인 생각과 의견을 가진 아이로 길러내기 위해 어떤 식의 교육을 하고 있는지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추려봤습니다. 핵심은 이거예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나이에 맞는 방식을 취할 뿐) 아주 자연스럽고 일관된 교육 하에 사고(비판적 사고 포함)를 키워 한 명의 어엿한 민주주의 구성원을 만들어낸다는 데 그 목표가 있다는 것.
아, 인터뷰이에 대한 짧은 설명을 하자면 남학생이고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2세입니다. 한국에서도 잠깐씩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데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어른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 이민을 가신 분들이라 한국적 정서도 꽤 있는 친구입니다. 다만 한국어보다 독일어가 훨씬 능통한 친구라서 한국어로 답을 해야 하는 저와의 인터뷰에서 답변을 위한 적절한 어휘를 찾느라 진통이 좀 있기는 했습니다.
Q. 듣기로 한국 교육도 경험해본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독일과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던가요.
"가장 다르다고 느낀 건 한국에선 공부할 때 주로 외워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독일 학교에서는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토론을 많이 하거든요. 시험을 볼 때도 객관식 시험이 거의 없어요. 정답을 찾는 시험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과목이 에세이를 통해 자기 생각을 쓰는 시험을 보죠."
Q. 에세이로 점수를 매긴다면 선생님들의 주관이 개입할 텐데 결과에 다들 승복하나 봐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실제로 점수를 둘러싸고 선생님과 논쟁을 벌일 때도 있고요. 하지만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은 대부분 합의점을 찾고 끝나요. 바로 이걸 두고 어떤 한국인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한국에서 만일 모든 과목을 에세이로 시험 본다면 다투다가 법정까지 가는 일이 많을 것 같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더라고요."
Q. 왜 독일에선 논쟁을 통한 해결이 가능한데 한국은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요.
"항상 그래 왔거든요. 공부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고 토론하면서 해결하는 방식을 경험해왔으니까요. 그럴 때는 대상이 선생님이든 또래 친구들이든 똑같이 평등한 관계가 되는 거예요.
몇 년 전에 필리핀에서 열린 캠프에 참여해본 적이 있어요. 그 캠프에 한국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들 알았다고만 하고 의견을 말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뭔가 아주 불공평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저는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그런 상황에선 자기 할 말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거든요. 제가 항상 제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며 토론하는 분위기로 만드니 처음엔 선생님도 좀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해주시더군요. 토론이라는 게 싸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답이나 결론을 찾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 것이니까요."
Q. 아주 어릴 때부터 토론 학습이 된 거군요?
"토론 자체를 배우는 게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 거죠. 이를테면 저학년일 때는 학교 생활 자체가 다 어떻게 보면 토론의 과정이에요. 친구들과 다툼이 있을 때도 선생님은 직접 개입해서 해결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죠.
학년이 올라가면 교과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을 하는데요, 특히 세계 2차 대전이나 홀로코스트 등 역사 관련한 주제와 문제의식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과 가치관을 만들어가도록 엄청나게 토론을 많이 해요. 토론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각자 자기 주관을 만들어가도록 자연스럽게 학습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Q. 저학년과 고학년이 어떻게 다른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보통 독일에서는 4학년 정도까지 학습을 엄청 중요하게 하지는 않아요.(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발표 수업은 정말 많아요. 과목마다 관련 정보가 담긴 페이퍼 등을 받아서 혼자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해요. 아 이때 부모님은 전혀 도와주지 않아요. 한국에서는 학습 과제할 때도 부모님이 도와준다고 들었는데 독일은 다들 각자 해요. 발표의 방향 등에 대해서 부모님과 대화할 때도 있지만 결과물은 온전히 혼자 만들죠. 수업 시간에 발표가 끝나면 의무적으로 모두들 피드백을 주어야만 해요. 어떤 게 좋았는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등등을 이야기해주죠. 그렇게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에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훈련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고학년 특히 김나지움(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인문계와 실업계를 일찌감치 나눠서 교육합니다. 대개 5~6학년 즈음에 결정하는데, 나중에 대학에 진학할 친구들은 인문계 학교인 김나지움으로 진학하고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택하거나 아직 판단 유보인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진학합니다)에 입학하고 나면 본격 토론 수업이 진행됩니다. 거의 전 과목에서 토론을 하지만 히스토리와 독일어, 영어 같은 과목에서 토론이 많이 이뤄져요. 토론이 적용되는 수업들의 공통점은 토론을 통해 관련 배경 지식을 풍부하게 터득하고 깊이 있는 오피니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에요. 토론하는 과정에서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서로의 의견이 맞고 틀리다, 가 아니라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거죠."
Q.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 비판적 사고가 가능하겠군요.
"당연히 그렇죠. 앞에서 독일에선 모든 과목에서 시험을 볼 때 에세이를 쓴다고 이미 말했는데, 에세이라는 게 팩트를 쓰는 게 아니라 주제에 대한 자기 의견을 써야 하는 것이거든요. 보다 중요한 건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마는 게 아니라 어디서 근거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써야 해요. 그 논리를 펼친 다음에 그래서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 가 되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에세이를 쓰는 건 글로 쓰는 혼자서 하는 토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결론을 내기까지 그 주제에 대한 어떤 다양한 논쟁이 있는지 그 논쟁들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서술한 후에 나만의 오피니언이 결론적으로 나와야 하는 거죠."
Q. 에세이의 주제는 주로 어떤 것들인가요?
"보통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아요. 독일은 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옛날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요.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의미를 주는지, 동서독의 경제적 차이 발생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등 지금과 관련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죠.
사회, 문화 등 시사적인 이슈도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최근의 이슈를 다룬 뉴스 기사를 읽은 뒤 본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의견을 쓰게 한다거나,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빅 토픽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게 하는 경우도 있죠. 특히 11학년 이상이 되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 폴리티컬 사이언스 혹은 소셜 사이언스라는 과목이 생기거든요. 그 수업들을 통해서 현세대의 문제점이라던가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배우게 됩니다.
(독일 청소년 혹은 대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목소리를 많이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듯합니다.)"
Q. 뉴스 기사 등이 중요한 교재가 되고 있군요. 그럼 필독서 같은 건 없나요?
"필독서도 있어요. 한국은 굉장히 많다고 들었는데 독일은 한 학년에 한 두권 정도? 굉장히 클래식한 책들이고요, 이 책들을 읽을 때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기보다 분석하면서 읽는 게 훨씬 중요해요. 시험을 볼 때는 보통 이런 책들 중에 한 두 페이지를 주고 그 페이지 자체를 분석해서 글을 쓰게 하기도 해요."
Q. 끝으로 독일 교육의 가장 큰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토론을 통해 자기 의견을 만들어간다는 거죠. 어릴 때는 친구들하고 의견 차가 있을 때 싸우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소리만 지르는 게 솔루션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죠. 요즘 저는 친구들하고 사회 이슈나 정치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데 세상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라는 기본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에 어떤 주제로든 토론이 가능해요. 내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의견을 들으면서 같이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심하게 논쟁하다 보면 마치 싸우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다음 날 우리는 또 웃으면서 만나고 그 이야기를 다시 진지하게 할 수도 있어요. 각자의 다른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요. 한국에서는 밥 먹을 때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전혀 안 그래요. 내 의견이나 생각이 다 옳을 수 없잖아요. 토론할 때 친구들 이야기 듣다 보면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상황이라고 해도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저 의견이 맞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친구, 친구 부모님, 선생님, 심지어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하고 그 어떤 주제로도 토론이 가능한 문화, 그게 독일의 강점인 것 같아요. 자기 가치관, 의견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독자에 따라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요즘은 어릴 때부터 논술학원에 다니고 독서 토론을 하고 글쓰기도 잘하고 그렇더라고요. 한국 아이들 똑똑한 건 어딜 가도 다 알아주죠. 다만 저는 토론을 위한 토론이기보다, 점수나 스펙을 위한 토론이기보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독립적 사고와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건강한 자기 가치관을 갖고 어디서든 자기 생각과 의견을 드러낼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위한 토론 학습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입장입니다. 그것도 아주 어릴 때부터, 토론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자연스럽게요.
조카를 잠깐 가르치는 동안, 우리 아이에게 하듯이 굉장히 열린 자세로 토론을 했었는데 특정 주제의 경우 지나치게 '정답'만을 이야기해서 제가 물은 적이 있었어요. "혹시 어디서 이 주제로 토론을 해봤니?" 구독 중인 토론 관련 어린이 신문을 보여주더라고요. 토론 주제가 있고 좌우 찬반으로 나눠서 찬성 의견 몇 개, 반대 의견 몇 개 제시된 페이지를 보고 걱정이 좀 되더군요. 단순히 보다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토론을 위한 예를 제시한 것뿐이라면 좋겠는데 아이들이 그걸 보고 토론 주제에 따른 찬반 의견을 정답처럼 머릿속에 넣고 있을까 봐서요. 경계 바깥으로 틀 밖으로 나가서 마음껏 생각을 펼치고 다양한 궁리를 해보고 때론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나 의견도 내놓고 그러다 비판도 받아보고 다시 생각을 다듬어보기도 해야 단단한 생각 근육이 키워지고 자기만의 주관과 가치를 지닌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