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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May 07. 2021

소실점을 옮겨주는 사람

"모두 한 곳을 볼 때, 다른 곳을 봐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
'소실점'을 옮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틀 전 읽은 유현준 홍익대 교수님의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 나오는 말이다.
'꿈이나 목표'에 대한 질문에 유 교수님의 답이 저러했다.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는 걸로 알지만, 고백건대 평소 그분의 팬은 아니다. 강연 프로그램을 좋아하다 보니 그분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자주 접하게 되긴 하는데 '직설적이고 통쾌한 화법이 좋다' 정도가 나의 솔직한 반응. 하시는 말씀 중에 수긍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인물론을 하자는 건 아니고, 다만 저 멘트 때문에 그분이 좀 달리 보이게 됐다. 소실점을 옮겨주는 사람이라니, 표현 자체도 멋지지만 내가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짚어주고 있어서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주로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렇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기도 하다. 아이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려고 하는 편이다. 대개는 좀 멀리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포인트 자체를 옮길 때가 많다.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아이가 3학년 한 남자아이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냈다. 방과 후 시간에 함께 축구를 하고 있는데 축구를 잘하는 그 아이는 매번 우리 아이에게 '축구를 너무 못한다'느니 '그럴 거면 축구 수업에 왜 들어왔냐'느니 '너 때문에 졌다'는 식의 비난을 공개적으로 한다고 했다. 그 아이에 대해선 익히 들었던 바,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아이를 위로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그 친구는 정말 너무 안타깝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서 많은 친구들이 자기를 싫어하게 만들까.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같이 보내는데, 좋아해 주는 친구가 없으니 그 아이는 정말 너무 안됐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자기편을 들어주거나 함께 화를 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이의 침묵을 '공감'으로 읽었다. 나는 다음 축구 수업에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아이가 그전처럼 씩씩거리거나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난받아 화가 나는 나'에서 '비난을 하는 안타까운 너'로 포인트를 옮겨놨으니까.  


좀 더 확장하면 나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유 교수님 표현처럼 '소실점을 옮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소실점이란 저 멀리에 있다. 소실점을 약간 옮긴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이 크게 흐트러지는 것도 아니다. 아주 약간의 변화가 생길 뿐. 현재에 충분히 감당 가능한 변화로 미래(소실점)가 달라질 수 있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오늘도 이런 생각들을 하며,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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