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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Jun 01. 2021

아이와 함께 다큐멘터리

'딕 존슨 이즈 데드'를 보고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텔레비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머가 넘치는 어린이 드라마만을 애정하죠. 은근 고르는 눈도 까다로워서 몇 편 안 되는 드라마들을 수도 없이 돌려봅니다. 요즘엔 다시 넷플릭스에서 '인베스티게이터즈(Inbestigators)'를 보고 있더군요. 네 명의 어린이 탐정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문제들을 재치있게 해결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어른이 봐도 재밌어요.


아이가 커가니 점점 각자의 시간이 많아집니다. 같은 장소에 있으되 서로의 할 일을 하는 시간을 즐기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함께 하는 '무언가'를 발굴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고민의 결과물로 주말마다 TV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쯤 된 것 같아요. 텔레비전이라는 가장 쉽고 편한 매개를 통해 함께 시청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아들은 가만히 '보는 것'만 하지는 않습니다. 중간 중간 우리의 대화는 청취를 방해할 정도라서 다시 화면을 돌려봐야 할 정도지요. 다큐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레 시청 소감이며 보면서 들었던 여러 생각들,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저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져요. 같은 것을 봤지만 우리는 어떤 장면에선 전혀 다른 것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의 대화 속에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까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꾸밈없이 내어보이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긴이 되기도 하고요.


처음엔 여행 다큐를 보면서 우리가 유럽에 살면서 갔던 나라들, 도시들을 다시 추억하고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다음엔 자연 다큐를 봤지요. 우리집 아이는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와 거리가 있습니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 가령 벌레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연다큐를 굉장히 사랑합니다. 동물 혹은 곤충도감의 사실적인 묘사를 견디지 못해 책장을 휘리릭 넘겨버리는 아이가 그 디테일한 다큐 속 장면들은 눈이 빠져라 보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환경 다큐도 목록에 추가했습니다. 독일에 살 때부터 환경 문제는 학교에서 숱하게 다루는 주제였는데 서울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꼭 학교 커리큘럼이기때문은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많은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환경 문제에 급격히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현재 다니는 학교에 '화학자'를 꿈꾸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역시 환경에 관심이 많아 둘이 대화를 많이 나누는 모양이더라고요.

최근 그 친구의 추천작이기도 했던 '씨스피라시(seaspiracy)'를 함께 본 후 환경에 대한 아이의 세계는 더 넓어졌습니다. 바다 속 세계와 지구, 그리고 우리. 이 세 관계에 대해 지금껏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질문을 던지는 '씨스피라시'를 우리는 두 번 반복해 시청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지금도 아이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어떤 장면들을 소환해냅니다. 아이의 생각 깊이가 조금 더 깊어졌고 가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나는 느끼고 있죠.


바로 지난 주에 본 다큐멘터리는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연과 환경을 넘어 인간의 삶으로까지 주제를 확대한 것이죠. 다큐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Dick Johnson is dead)'였습니다. (최대한 자제하지만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커스티 존슨이 자신의 아버지인 딕 존슨의 죽음에 대해 다루는 다큐입니다. 그런데 좀 오묘해요. 픽션이기도 하고 논픽션이기도 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감독인 딸은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영화'를 만들기로 합니다. 딕 존슨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 상황을 '촬영'하고 마침내 연출된 자신의 장례식을 문틈으로 들여다보기도 하지요.


나는 이 영화를, 아니 다큐를 보는 내내 우리 부모님, 시부모님을 떠올리며 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힘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딕 존슨의 젖은 눈이 포착되는데 때론 그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때로는 그 복잡다단한 깊이를 알기 어렵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우리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아마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돼 감정이 솟구치더군요.


다큐가 끝나고 아이와 나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죽음에 대해 유쾌한 접근을 하는 다큐 속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다큐 속에는 (어차피 상상이니까요) 천국도 나옵니다. 그리고 딕 존슨이 죽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감동이라고 말했어요. 죽음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행히 아이는 그다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더군요.


나는 아이에게 질문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장례식을 볼 수 있었던 딕 존슨은 정말 행복한 분인 것 같아. 우린 누구도 그럴 수 없잖아. 연출된 장면이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모두가 진심으로 딕 존슨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잖아. 우리가 만일 각자의 장례식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장면은 어땠으면 좋을까? 그 장면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지 몰라."


아이와 함께 시청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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