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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시험 기간엔 9시 뉴스도 예능이지

핑계를 대어봅니다.

by 따름


학교 다닐 적, 시험기간만 되면 왜 그렇게 9시 뉴스가 재미있었을까요. 야구 중계는 또 어떻고, 씨름은 왜 그리 흥미진진했던지요. 평소 스포츠엔 관심도 없던 제가 말입니다. 다큐멘터리도 재밌고, 엄마가 “마늘 좀 까줘”라고 부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험기간이었으니까요.



어른이 된 지금, 그때 그 9시 뉴스만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에겐 요즘 글쓰기와 책 읽기가 그렇습니다.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냥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도대체 글쓰기가 왜 재미있는 걸까, 하고요.


저의 본업은 글쓰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또 쓰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아닌 사람 중에도 글쓰기를 취미로 삼는 분들이 많지요. 저 역시 어느 날엔 막연하게 ‘글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본업을 다 내려놓고 글만 써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의문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왜 오늘도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본업이 아닌 곳에 한 눈을 팔고 있는 걸까요?


어른이 되어 가장 좋은 점은 시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해도, 책을 안 읽어도, 핸드폰을 하루 종일 들여다봐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시험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요. 오늘까지 마쳐야 할 일, 장기 계획, 단기 과제, 당장 눈앞에 쌓여 있는 처리해야 할 일들, 그리고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할 수많은 업무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요.


현실이 이렇게 녹녹지 않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혹시, 그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시험기간이면 뭐든 재미있던 그때 그 시절, 중학교 2학년의 나처럼요. 마늘 까기도, 청소하기도 그렇게 즐거웠던 그 시절처럼, 지금도 현실을 피해 이쪽 세계로 도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일이 많을 때일수록 글감이 잘 떠오르고, 글을 써야 할 때는 책이 그리워지고, 책을 읽어야 할 때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청개구리 인생이지요. 내일 시험인데 축구하러 가야 한다는 중학생 친구가 떠오릅니다. 그 친구에겐 그날의 축구가 인생 최고의 재미였겠지요.


사실, 본업에 더 충실해야 하지 않나 하는 죄책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쓸모’에 대해 글을 썼던 것도 이런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요즘도 종종 이런 감정이 올라올 때면, 이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숙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일과 중 본업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틈이 날 때마다 책과 글에 마음이 자꾸 기울어지는 건, 그것이 본업이 아니기 때문에 더 동경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문득 의심하게 됩니다. 글 쓰고 책 읽을 에너지를 전부 본업에 쏟아도 부족할 판인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다가 또 다른 내 안의 다른 목소리가 속삭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만 하다 죽으면 억울해서 어쩌려고 그래?" 정답이 없는 내 안의 다중이들과 매일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손에 쥔 것에 대한 애착은 그 순간부터 서서히 줄어든다지요. 손에 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정점이라고. 어쩌면 글쓰기를 끝내 손에 쥐지 말고, 지금처럼 한 발만 살짝 담근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 글을 쓰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이라는 녀석도 한 몫을 합니다. 돈을 받지 않고 쓰는 글이기에 더 재미있게 아무 말이나 쓸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오늘도 본업과 취미의 경계는 줄다리기 중입니다. 어쩌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본업이 아닐 때,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하지만 이런 생각도 내일이 되면 또 달라질지도 몰라요. 정답이 없는 인생, 오늘도 하루하루 주어진 내 앞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경계를 살살 오르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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