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돌아다녀야 에피소드가 생긴다

by 느린 발걸음


유튜브에서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많이 돌아다녀야 에피소드도 많이 생긴다고.

또 하루는 팟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MBTI에서 J성향인 사람들은 실수와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다 보니 실수나 에피소드가 거의 없다고.


지금까지 저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저 얘기들을 듣고 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래. 나는 에피소드라고 부를 만한 일이 많이 없다.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었고, 완전 J는 아니지만 J이다 보니 계획 속에 나를 두는 게 편했다.

그게 나를 에피소드가 빈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I성향이지만 집에만 있는 건 갑갑해서.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돌아다니지 않은 건 맞다.

돌아다녔다고 해도 매번 갔던 곳 위주로 가다 보니 새로운 일이랄 게 별로 없었다.

예측 가능한 곳에서 움직이는 걸 좋아했고 불확실한 걸 그리 즐기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의 비슷한 날들이었으니 하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아, 물론 술을 많이 마셨을 때는 의도치 않게 에피소드가 생기긴 했지만.

그건 흑역사에 가까운 기억들이 섞여 있어서 어디에서 이야기하고픈 유쾌한 에피소드는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다 보니 의문이 든다. 에피소드가 많은 게 꼭 좋은 걸까?

그만큼 많은 경험을 했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는 게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걸까?

타인에게 이야기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확실히 유리할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해 내키지도 않는 에너지를 써야 할까?

빈약한 에피소드에서도 얼마든지 뭔가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지나쳐버릴 법한 것을 붙들고 세심하게 바라보면서 내면적으로 깊이 파고들 수 있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고,

부족한 에피소드는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면서 많이 채울 수도 있을 테다.

그래, 그러니 에피소드가 많아서 이야기할 거리가 풍부하다는 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에피소드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에피소드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에 나는 내가 못마땅했다. I성향인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없는 내가 별로였다. 어떻게든 1%라도 있을 E성향을 끌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뭐, 결과는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런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이해하주겠는가.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세계를 거치면서 의도치 않게 에피소드가 하나 둘 생겼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들이다 보니 헛발질도 많이 했다.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고.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싸인 경험들. 에피소드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일일지라도 내 마음에 남아 있으면 그게 에피소드가 아닐까.

그 순간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하나씩 기록하고 있다.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는 없으니 내게 인상적인 것들 위주로. 이 기록들이 내 에피소드의 흔적 아닐까 싶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민낯을 알게 되고 왜 그런지 궁금해서 책도 읽고 강의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여러 것들을 내 경험과 버무리면 그것도 에피소드가 되지 않을까.

물론 빵빵 터질 만큼 웃긴 이야기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진지하게 접근해야만 하는 이야기들.

가만 보니, 에피소드라는 게 꼭 웃길 필요가 있을까?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 아닐까?


국어사전에서 에피소드의 뜻을 찾아봤다.

에피소드 episode

1. 명사 : 남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재미있는 이야기.

2. 명사 :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줄거리에 끼인 짤막한 토막 이야기.

3. 명사 : 민담에서 말하는 모티프의 한 덩이.


아, 꼭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된다. 왠지 안심이 된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에피소드는 내가 정하면 되는 게 아닐까.

내 이야기는 타인이 아닌 내가 할 때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하면 훨씬 더 재밌게 전달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내게 없는 능력을 너무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가진 강점을 더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다짐하지만 또 흔들리고 흔들리겠지.

그래도 흔들리면서 금방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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