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한 문장
가끔 그림책을 본다. 긴 호흡을 가진 글을 따라가느라 지친 나를 위해서.
그림책을 제대로 본 건 두 아들을 낳고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부터다.
그전에도 아주 가끔 읽어본 적은 있지만 마음에 깊게 남지 않았었다.
그냥 이런 책이 있구나 휘리릭 읽고 넘긴 정도.
그림책에서 그림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제대로 보지 않고 글자만 대강 보고 넘겼다.
아마 지적 허영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글자로 빼곡한 책만 책으로 여겼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데, 책을 빈약한 내 지식을 포장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림책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처음 아이들에게 읽어줄 땐 그냥 의무감에서였다. 읽어주면 좋다고 하니까.
그림은 자세히 보지 않고 글자만 무슨 기계처럼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그림 속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을까 찾아보는 내가 보였고(이건 아이들에게 배운 거다. 아이들은 그림을 먼저 보기에 그림을 자세히 보고 나에게 이런 것들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게 멋졌다.
그때부터 크기도 두께도 다양한 그림책의 매력에 빠졌다.
지역 서점에서 하는 그림책 작가와의 만남에도 두 번 정도 참석할 정도로.
한동안 그렇게 그림책에 꽤 빠졌었는데,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조금은 뜸해졌다.
관심도 조금씩 시들해져 가던 시기, 그림책 북클럽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가끔 참여했다.
그때 알게 된 소중한 그림책들. 내가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중에 한 책, 이순옥 작가의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는데, 이 책을 펼치고 읽는 내내 모든 그림과 문장이 좋았다.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태어나는 풀들을 보면 사랑스럽고 애잔하고 때론 위로를 받습니다. 꼭 우리 삶의 몸짓과 닮아 보여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라는 작가님의 말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싶은 동질감이 느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민들레 같은 들꽃, 들풀을 보기 위해 잠깐 멈춰서 바라보고 대단하다는 감탄을 할 때가 꽤 있다.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갔다.
지나가는 화려한 꽃에도 눈길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들풀에는 더 그랬겠지.
그런데 3년 전쯤부터인가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잡초 정도로 여겼다. 생명력이 대단하다! 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견해졌다. 특히, 어떻게 저런 곳에 자리를 잡고 자랐을까 싶은 들꽃을 만날 때.
화려하지도, 향기가 강하지도 않아서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메인 자리가 아닌, 모퉁이나 틈새 같은 구석진 곳에 조용히 피어난다.
그 작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까, 아무도 봐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미관을 해친다며 베어질 운명에 처할 때도 많은데, 그런 운명은 알고 저렇게 열심히 자라는 걸까?
꿋꿋하게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내는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대견하고, 그래서 더 멋지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문장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길고 긴 외로움도
오랜 기다림도
괜찮아, 나는.
나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나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한다. 강하다. 작지만 강하다.
내가 길을 가면서 만난 들풀들은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있으니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이다.
나는 어떻게 살았지?
저런 마음을 품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외로움이 싫었다. 오랜 기다림도 싫었다. 인내심이 있는 편이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답답했다.
이렇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몇 번 하다가 그만둔 것도 꽤 있다.
시간이 쌓여야 한다는 걸 제대로 몰랐다.
나로 살아간다는 게 뭔지도 몰랐다.
그냥 주변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게, 남들이 알아주는 그런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잡초 같은 들풀보다 화려하고 예쁜 꽃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삶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남들 뒤만 쫓느라 헉헉대기만 했다.
그게 진정한 나라고 착각하면서.
이런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건 아마 4년 전쯤부터였던 것 같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면서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남편이 추천해 준 책 한 권과 남편의 이야기로 생각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초록색으로 뭉퉁그려 보였던 자연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 보였다.
나는 저들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나 질문했을 때 아니었다.
그냥 되는대로 사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비록 두 아들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자투리 시간이라도 잘 활용해 보자고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나를 채찍질했다. 뿌듯한 날도 있었지만 자주 지쳤다. 그때서야 알았다.
진정한 내 모습이 뭔지도 모른 채 어떻게든 앞으로만 나가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잠시 멈췄다. 그때까지 하던 것들을 멈추고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시기를 가졌다.
그러면서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그 나이대에 이뤄야 할 생의 과업에 매달리고 있었음을.
개인의 개성은 무시한 채 또 어느새 평균이라 여겨지는 집단에 들어가고 싶어 했음을.
그러면서 어렸을 때 내가 느꼈던 사십이라는 나이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이 정도 되면 진정한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경력은 정점을 향해 나아가면서 뭔가 하나는 이뤘을 거라 여겼다.
주변의 많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가진 나이일거라 예상했다.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는데, 실제 내가 맞이한 마흔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루어놓은 건 없고, 평생 직업이라고 여겼던 일은 내가 좋아하지 않았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집안일 하며 아이들 양육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 괜찮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시기에 들꽃에 내게 위로를 건넸나 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피어나는 모습이 참 단단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졌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지 않아도 괜찮은, 나만의 삶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 말이다.
나만의 꿈을 꾸며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해 나가는 들꽃처럼.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고 나다운 걸 찾아 하기로 했다.
비록 헤맬 때도 많고,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할 때도 많다.
어떤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들꽃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
그래, 나도 저들처럼 살아보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