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린 발걸음 Apr 15. 2023

느려도 괜찮아



이틀 전 집 앞 작은 공원을 지나다 초록색들 사이로 툭 불거져 나온 하얀 벚나무가 제 눈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봄꽃의 설렘에 들떠서 이야기할 때, 제가 사는 지역은 봄꽃이 조금 게으름을 피웠어요.

봄꽃 입장에서는 아직은 때가 아닌가 라며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제가 사는 지역의 기온이 다른 지역보다 조금 낮은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루는 여름인가 싶을 만큼 기온이 확 올라간 날이 있었어요. 그날을 기점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어요. 늦게 핀 벚꽃을 보며 다른 꽃들과의 조화에, 눈에 황홀함을 담고 있었어요.


걷기 운동 중에 만난 봄꽃들


며칠 봄꽃들의 배웅을 받으며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식목일 봄비가 세차게 내렸어요.

그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식물들이 물을 흠뻑 마시겠다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꽃들이 다 떨어지겠구나! 조금은 아쉬웠어요. 꽃잎이 떨어진 길을 걸으며 그 길마저 이쁘다 생각하고 눈에 담고 있었죠.


비가 내린 후 떨어진 벚꽃잎들


다른 해보다 벚꽃을 오래 보지 못한 아쉬움을 속으로 달래고 있을 때, 다 떨어진 벚꽃들 사이로 뒤늦게 핀 벚나무 2그루가 보였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꽃을 틔운 두 벚나무 덕분에 다시 벚꽃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벚꽃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느려도 괜찮은 것 아닐까?

다들 한꺼번에 덩달아 피었다가 어느새 같이 사라지는 것보다 저렇게 늦게 피었다가 늦게 지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하고요.


최근 '최재천의 공부' 책을 읽고 있는데, '우리는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맞혀야 하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동안 뭐든 빨리빨리 하려고 했고, 그것을 저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강요하고 있었어요.

직장 생활할 때 느리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왜 저렇게 느리지? 좀 빨리빨리 할 수 없나? 왜 저게 한꺼번에 되지 않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답답해했어요.

두 아들이 태어난 이후 아이들에게도 빨리빨리 하기를 강요하고 있는 제가 보였어요.

첫째가 행동이 좀 느린 편이에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은 빨리하는데 보통은 움직임 자체가 느려서 제가 좀 빨리할 수 없냐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빨리빨리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게 저도 모르게 저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어요.


그러다 늦게 핀 벚나무 두 그루를 보면서 문득 깨달은거죠.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것을요.

그동안 제 속도가 맞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속도를 무시해온 것이 참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육아서적을 읽어도 아이만의 속도를 존중해주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는데, 며칠 반짝 기억하다가 또 잊어버렸거든요.

속도라는 것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고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거죠.

빨리빨리해서 일의 처리는 빨랐을지 몰라도 그 깊이는 제대로 채우지 못한 경우가 꽤 있어요.

저라는 사람, 저의 인생에 대해서도 빨리빨리 답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오랜 시간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내리지 않았어요.

이런 시간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삶의 어느 순간 한 번씩 주저앉을 때가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을 때조차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빨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내 삶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나 자신에게도 줘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이겠죠. 정해진 시간 내에 뭐든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어느새 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간을 놓치면 점수가 달라지는 시절을 살았으니까요.

의도적으로라도 조금 천천히 해볼까 생각은 하는데 그게 또 쉽지는 않더라고요.

어느새 속도를 내고 있는 제가 보여요.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요.


살다 보면 속도를 빨리 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도 있어요.

그 둘을 잘 선별하고 각자 일의 성격에 따라, 또 제 기분에 따라 조금씩 변주해야 할 것 같아요.

하나만 추구하는 삶은 단조롭고 지치기 쉬운데 반해, 여러 가지 다양성을 열어두면 많은 것을 캐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저는 그동안 너무 빨리만 달려오려고 했기에 중간에 체하기도 하고 넘어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힘들어 지쳤을 때조차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에 어느새 또 지치고 넘어졌고요.

아직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방향에서 지쳤으면 다른 방향으로 틀어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 방향도 아닌 것 같으면 또 다른 방향으로...

저도, 아이들도, 제 주변도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바라봐야겠어요.

빨리 훑어봤을 때와 조금은 느린 시선으로 음미하며 바라봤을 때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졌어요.

지금 이 생각을 또 어느새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가끔이라도 다시 떠올린다면 그 횟수가 늘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도 어느새 조금은 느린 것을 마음속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 돈가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