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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발걸음 Jun 10. 2023

'일상의 빈칸'을 읽고...


'일상 :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사전적 정의에서 '반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지루함, 권태 등이 연상돼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좁은 시각으로 일상이라는 단어를 대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달라요. 세세하게 바라보지 않고 뭉뚱그려서 쳐다보니 하루하루가 똑같아 보여 재미가 없어요. 빽빽해 보이는 일상 속에도 빈칸이 군데군데 있어요. 내가 의식하면 분명 찾아낼 수 있는 빈칸 말이죠. 


<일상의 빈칸>은 그 빈칸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에요. '가장 가까운 곳의 가장 새로운 발견, 당신의 생활 속에 반짝이는 크리에이티브 조각들'이라는 책을 설명해 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어요. 거리의 빈칸, 장소의 빈칸, 사물의 빈칸, 언어의 빈칸, 시대의 빈칸을 저자만의 시선으로 채우고, 마지막에는 빈칸을 남기면서 책을 끝마쳐요. 남겨진 빈칸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거죠. 




"일상을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무궁무진한 '빈칸'이 발견된다. 그 빈칸에 새로운 의미를 채워 넣게 되면, 일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난다. 일상을 클래식이 아니라, 재즈처럼 생각해보자. 일상을 자유롭게 바꾸어보자. 찬란한 일상의 변주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P. 8~9) 


일상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무궁무진한 빈칸이 발견된다는 저자의 말에 궁금해졌어요. 도대체 어떤 빈칸을 발견할 수 있으며, 거기에 어떤 의미를 채워 넣을지요. 변화를 싫어하는 뇌의 습성으로 인해 지루해하면서도 일상의 반복과 단조로움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는데, 일상을 변주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요. 



P. 20~21 '거리의 빈칸' 중에서


거리는 사람과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면서 에너지를 내뿜어요. 길거리에 버려진 많은 명함, 온갖 나라와 온갖 시대가 공존하는 멀티버스인 간판, 라이더와 크록스를 보며 저자는 그사이에 빈칸을 발견해요. 일상에서 매일 마주쳐서 그냥 그런가보다 힐끗 보고 지나쳐 버리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거리는 정말 무궁무진한 의미의 스케치북이다. “ 


저자는 자신만의 의미를 듬뿍 담은 스케치북을 만들어요. 대출 명함을 보고 마케팅, 경쟁, 레드오션을 생각하고, 거리에 넘쳐나는 간판을 보며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리고, 라이더를 보며 인간의 욕구를 생각해요. 흔히 보이는 그래서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들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빈칸을 찾는 과정이겠죠.



장소는 일종의 '문법'이다. 그 문법 체계 안에서 어떤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어떻게 문법은 파괴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소소한 재미가 있다. 장소의 문법대로 바르게 살고 있다면, 한 번쯤은 '비문'의 일상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P. 57) 


우리는 장소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는 쉽게 변경하려 하지 않아요. 이런 정해진 문법 내에서는 내 사고가 말랑말랑해질 틈이 없어요. 가끔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배치로 인해 응?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 숨은 의미인 공시까지 잘 읽어내고 나만의 공시를 표현하는 것, 재미있을 것 같아요. 비문이 잘 읽히지 않아도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고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신선함을 주는 것은 아닐까요. 



"세계는 사물들의 빽빽한 집합이 아니다. 세계는 언제나 빈칸을 허용한다. 사물의 틈새에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낯선 의미의 여행이 펼쳐진다."(P. 93)

P. 99, 101, 106 사물의 빈칸' 중에서


DHL과 CJ대한통운, 배치를 달리한 마르셀 뒤샹의 <샘>, 앤디 워홀의 작품들, 17세기를 20세기로 재배치한 발렌시아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재해석한 SSG 광고, 맨홀 뚜껑, 초코파이, 치킨 등의 사물을 통해 빈칸을 발견한 저자의 이야기가 펼쳐져요.

"같은 규칙만을 강요하는 동일성의 세계에서 벗어나보자. 간단한 '배치' 행위만으로도 일상에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요약된 단어와 단어 사이, 그 빈칸에 본질이 있다. 언어는 키워드의 결합 그 이상이다. 사람의 말과 글뿐 아니라 음악, 건축, 패션, 표정, 회화 등 다양한 기호체계를 통해 에둘러 말해야 하는 의미의 연쇄체다. 세계에 둔감하지 않으려면 모든 언어에 애정을 두어야 한다. 신속한 언어부터 느릿한 언어에 이르기까지, 그래야 그 빈칸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다."(P. 130) 


P. 138 '언어의 빈칸' 중에서


'옆집이 쉽니다. 덩달아 쉬어요. 가을이 이뻐서! 오늘(하루)만 쉽니다'는 저자가 핸드폰 사진첩을 뒤지다 발견한 오래된 사진이라고 해요. 이쁜 말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어요.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이 처음엔 모자라고 말했던 그림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는 걸 보며 굉장히 슬펐다고 해요. 하나의 상상력을 예시로 보여준 것뿐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생각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도 아마 그런 어른 중의 한 명일 거예요. 일상을 빽빽하게 채워 빈칸이 스며들지 않게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빈칸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 생각 또한 굳은 채로 말랑말랑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며 길거리에서 자주 보는 것들도 자세히 바라보면 참 재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구나 알았어요. 저자는 흔한 명함, 간판, 가게, 사람, 지하철 등을 보고 빈칸을 발견하고 메시지를 나름대로 해석해요. 크리에이티브하다는 것, A라는 유에서 B라는 유를 만드는 것! 배치를 달리함으로써 새로움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일상이라는 것에도 배치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빈칸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어요. 그 빈칸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 넣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죠. 저는 어떤 다양한 생각과 색감을 채워 넣을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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