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린 발걸음 Aug 24.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어느 순간 많이 보이고 많은 사람이 언급한 소설인 '아버지의 해방일지'. 

언젠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쉽게 손이 가지는 않았어요. 아마 '아버지'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 그리 사이좋은 부녀지간은 아니기에, 읽고 싶다는 욕망 vs 아버지라는 단어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 들렀을 때 초록색 표지에 3개의 집 그림과 자전거를 타고 바쁘게 가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의 책 표지에 저도 모르게 손에 집어 들었어요. 그렇게 남들보다는 조금 늦게 이 책은 제게 찾아왔어요.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두루 입증받은 정지아 작가. '리얼리스트'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녀가 32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에요. 책을 짧은 기간 내 많이 내는 작가도 꽤 보았기에, 32년에 걸쳐 완성한 소설은 어떤 내용을 품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 그것도 전봇대에 부딪쳐 육신과 자신을 옭아매던 빨치산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던 아버지. 책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를 훨훨 자유롭게 보내드리는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아주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시대상을 떠올려 볼 수 있어요. 내용이 무거울 수 있는데 군데군데 유머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까지 더해져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어요.


십 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던 아버지. 한번 선택한 이념으로 다양한 시대를 거치면서 아버지는 힘겨운 생활을 하지만, 아버지 나름대로 적응해 나가요.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눈총을 받기도 하고, 미움도 받지만... 유물론, 민중을 우선시하는 신념 하나로 다른 사람들의 힘듦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해요. '오죽하면 그랬겠냐?'라는 아버지가 항상 하셨던 말. 그런 아버지로 인해 어느새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딸 아리. 50이 넘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돼요.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아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중략) 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P. 76)


딸이 느꼈던 무력감이 전해졌어요. 아버지는 빨갱이가 되겠다고 자신이 선택했지만, 딸은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냥 태어나보니 아버지, 어머니가 빨갱이던 것이죠.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빨갱이'란 말이 금기어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죠.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는 빨갱이야?" 서슴없이 내뱉던 폭력적인 말들. 이념, 사상 같은 것도 다 사람이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서로의 입장만 옳다고 우기는 것일까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여러 갈등들... 저도 은연중에 그런 갈등을 조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끔하더라고요. 자기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P. 98)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P. 138)


항상 당하기만 하는 것 같은 아버지.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온갖 궂은일을 앞장서서 하는 아버지. 딸은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아요. 가족보다 남을 더 챙기는 아버지처럼 비쳤기에 원망도 하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마다 이야기해요. "오죽하면 그랬겠냐. 그러니까 사람이제." 글쎄요. 저는 그래도 자기 가족 먼저 챙기셨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가족에게는 그게 상처가 되기도 하거든요. 


"어떤 딸인지어떤 딸이어야 하는지생각해보지 않았다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P. 224)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할 때도 있고 잊을 때도 많아요. 자식인 아리보다 더 자식같이 굴었던 학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어땠나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서로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있기에 더 어려운 것도 있지 않나 싶어요. 말 안 해도 다 알겠지 싶은? 아니면 가까우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라는? 그런데 어떤 관계든 내가 쏟은 정성만큼 돌아오는 것 같아요.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그냥 미련 없이 그만둬 버리면 되는데... 가족은 또 그게 되지 않아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거든요. 서로 이야기를 하면 좋을 텐데... 새삼스레 뭔 얘기냐 싶고, 쑥스럽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오네요. 




책의 초반을 읽으면서 간결한 문체로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듯한 작가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어요.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면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소설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내용이 너무 생생하고 빨치산의 가족으로서의 삶을 너무 잘 묘사해서 자료조사를 많이 하셨구나 싶었는데,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빨치산이었기에 가족, 친척들의 삶에 여기저기 얼룩지게 해요. 빨치산 가족이라는 연좌제가 붙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해 우회하기도 하고,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탓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놓아버린 듯 보이는 작은아버지 같은 인물도 보여요.


책을 읽으면서 여러 질문이 떠올랐어요.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요? 내가 과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모르는 누군가의 모습을, 특히 가족의 모습을 타인을 통해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용서라는 것은 미워하는 대상이 죽고 나면 사라질까요? 아니면 내가 죽어서야 비로 사라질까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잘 살고 간다!'라고 말하며 미련 없이 웃으면서 떠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하나하나 저만의 답을 찾아가면서 읽었어요. 아직 답을 찾지 못해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생각도 있어요. 인생이란 어쩌면 이런 질문들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만의 답을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