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여행
봄날 갔던 곳을 가을에 다시 가고 싶다는 것은 계절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가을 단풍이 고울 시기에 인현왕후길을 다시 찾았다. 노란 단풍이 햇살 아래 황금색으로 물든 길을 걷는다. 은행나무 한그루 없는데도 숲은 노랑으로 물결친다. 생강나무숲길이다.
이른 봄날 숲에 들어서면 노랗게 몽글몽글하게 핀 꽃이 눈에 들어온다. 초록이 채 찾아오지 않은 숲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생강나무 꽃이다. 어린 가지나 잎에 상처를 내면 생강냄새가 난다하여 불린 이름이다. 멀리서 보면 노랗게 점멸하는 반딧불이가 숲을 유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숲에 생강나무 꽃이 피었으면 봄이 멀지 않았음이다. 한강변에 심어져 있거나 조경수로 비교적 흔한 산수유와는 엄연히 다르다.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생강나무에 비해 산수유는 꽃의 생김새가 성글고 새초롬하지 않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동백꽃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동백꽃이라 하면 찬 겨울을 이기고 2월 무렵 피는 붉은 동백꽃을 떠올리겠지만 소설에는 ‘점순이의 말을 잘 듣는다고 약속한 후, 노란 동백꽃 속에 함께 파묻혀 점순이의 향긋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진다’라고 나온다. 노란 동백꽃이라니? 김유정의 고향인, 강원도에 자라는 생강나무를 말한다.
이쯤에서 반전이 있다. 내가 숲에 다니면서 생강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는 곳을 본 것은 강원도가 아니고 경북 김천이다. 그것도 청암사, 무흘계곡과 가까운 인현왕후길이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모략에 폐위된 후 3년여 의탁했던 곳이 김천의 청암사다. 청암사는 비구니들이 수양하고 머문다. 청암사 절밥이 <명찰순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정갈한 경내와 더불어 여문 손끝에서 빚어진 음식들이 궁금해진다. 기회가 된다면 청암사에서 탬플스테이를 해보고 싶다.
인현왕후길은 청암사 주변의 수도산 자락을 휘휘 돌아 난 숲길이다. 총길이 9km로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걷는 것이 좋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때문에 숲길을 걷는 내내 여유롭다. 아니 덕분에 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길 위를 덮은 낙엽은 그 자체로 가을 도화지다. 두 세 사람이 걸으면 좋을 듯한 길 폭을 걷노라면 낙엽 밟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봄철 생강나무 잎을 많이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단풍든 모습을 상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생강나무숲이라 불러도 될 만큼 큼지막하고 노란 생강나무 잎이 곳곳에서 춤을 춘다. 큰 붓을 들어 노란색을 듬뿍 칠해놓은 것 같다. 붉은 단풍에 비해 화려함은 덜하나 잔잔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강나무의 노란 물결 사이로 산 허리를 따라 난 길이 호젓하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길에서 만난 가을은 과함이 없다. 청암사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 계곡쪽으로 내려오면 꽤 급한 경사에 조심스럽다. 점차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계곡이 가깝다는 얘기다. 도로까지 다 내려오면 구름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맑은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이 흐른다. 가까이에 용추폭포를 둘러보면 시원함이 더할 것이다.
가을에 걷기 좋은 길, 인현왕후길은 관광공사여름에 걷기 좋은 길에 선정되었다. 물론 여름도 좋지만 가을의 정취는 훨씬 깊이가 있다. 아직 때묻지 않은 길,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이 새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