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의 농도
지난번의 것은, 유난히도 길었다. 꼬박 8년을 한 사람과 연인으로 지낸다는 것은 내 인생을 사계절로 나누어도 한 계절에 맞먹는 시간을 함께한 일이라, 어쩌면 끝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결국은 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코로나로 타지에 발이 묶여 3년에 가까운 시간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라고, 우리라고 별나게 더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1년을 눈물로 보내고, 또 1년을 기약 없고 불투명한 미래에 힘들어하다 보니, 3년째에 접어들고는 기어이 익숙해지고야 말았다. 함께 공유할 것들이 줄어든 대화는 공백을 만들어내고, 그런 공백들은 연락의 부재로 이어졌다. 그렇게 뜸한 연결에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길 한참이 되었을 즈음,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눈에 든 정도가 아니라, 푹 하고 박혔다.
그냥 신경이 쓰이는 줄 알았는데,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행동 하나, 표정 하나에도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옴짝달싹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과거와 끝을 맺었다.
미안함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한 것에 미안한 감정을 갖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미 이별로 향하고 있는 마지막 여정에, 그저 옆자리를 지켜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거라고, 억지 부리듯 생각해버렸다.
그렇게 지난 사랑의 끝과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 나는 헤어졌어. 이제 확실한 마침표를 찍어야 할 이유가 생겨서.
그 사람의 어깨에 매달리듯 기대어 말했다. 나의 연애와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그와의 시작은 나의 이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이야기엔 끝이 있고, 그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해피 엔딩이 아니더래도 마무리 짓고 책을 덮어야, 또 다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나의 지난 사랑은 참으로 허망하게, 어떤 격한 감정의 소모도 없이 퇴색되듯 끝이 나버렸지만, 나는 책을 덮었고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거나 자극적인 스토리가 각광받는데도, 나의 이야기는 뻔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너무 뻔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연애 이야기. 모든 등장인물의 사랑을 독차지해 원치 않는 오해나 갈등이 생기는 일도, 상대의 어머님이 던진 돈봉투나 김치에 맞는 것도 싫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그냥 온전히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말하고, 사랑을 느끼는 매 순간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그렇듯 뻔한 관계가 가져올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카페를 가도 한 곳만, 그 레스토랑에 가면 꼭 그 메뉴만, 한 브랜드의 기초 화장품만 5,6년을 쓴다. 새로운 것이 주는 떨림을 배제하지 않지만, 언제나 다음번이 되었을 때 나의 선택지는 어쩌면 뻔한 것, 늘 내가 아는 그곳에 눈 돌리면 그대로 있던 것들이다. 편안함에서 오는 은근한 짜릿함에 더 반응하는 나에게, 의미 없이 툭툭 던져지듯 오는 자극은 오히려 피하고 싶은 씬scene 에 가깝다.
그저 오롯이 당신과 나, 우리 둘만이 등장하는 행복하고 소소한 매일의 일기 같은 이야기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기승전결 같은 건 쏙 빠진 슬로 무비여도 좋다고.
- 사랑해
- 뭐야 이렇게 불쑥. 엄청 설레게.
한 번 물꼬를 트자,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자주 사랑을 고백해온다. 매우 불시에. 그 말이 하루 열 번을 들어도 열 번 다 꼬박 가슴이 떨리고 설렌다고 이야기해주면, '그렇다니 좋아' 라 답한다. 자신도 그렇다고 되돌려준다.
그 사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사랑의 말들이 초단위로 쪼개어져, 내 몸 위로, 심장 위로 반짝거리는 가루가 되어 쌓여간다. 그리하여 내 심장은 하루 종일 반짝이며 세차게 뛴다.
그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그래, 지금 그런 이야기 어디쯤인가에 들어와 있는가 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렇게 나를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구나, 한다. 온몸의 솜털들이 모두 파르르 떨릴 만큼, 사랑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