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의 농도
- 와, 맛있겠다. 나중에 나랑 김떡순 먹어줘야 해
- 하하, 알았어
오늘도 먹을 음식 리스트에 메뉴를 하나 추가한다. 지난번 발치를 했을 때랑 비슷한 상황에 웃음이 나는가 보다. 나는 하나도 웃기지가 않다고. 임플란트를 하느라 발치를 하고 한 달, 뼈이식과 상악동 거상술까지 해야 해서 몇 달 동안 회복 후에 이제 또 2주째, ‘죽을 먹는다' 는 것과 '죽을 먹어야 한다' 는 완벽히 다른 뜻이란 걸 몸소 체험 중이다. 몇 날 며칠 죽만, 혹시 다른 것을 먹더라도 맛이 강하지 않은 계란찜이나 두부, 스프 없이 불도록 끓인 라면 같은 것들만 먹다 보니 그냥 나라는 인간도 같이 밋밋하고 심심해져 가고 있다. TV에 화려한 색감에 자극적으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만 나오면 나중에 먹겠다며 영혼을 빼앗긴 눈빛으로 죄다 리스트업을 한다. 옆에 있는 그도 덩달아 나와 먹어 주어야 할 음식들의 수가 쌓여가고 있다.
그런 상태에도 그를 만나는 일은 중단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만날 수 있는 모든 날들에 함께 있는다. 참 다행인 건, 그는 나보다도 훨씬 강하게 음식에 대한 집착이 없는 편이라 내가 죽을 데우고 있으면, 무심하게 냉동실에 얼려있던 곰국 같은걸 하나 녹여서 밥 말아 호로록 옆에 앉아 함께 먹어준다. 그런 그 사람을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당신이 참 좋다고 예외 없이 고백한다.
좋아하는 반주飯酒도 못하고, 나트륨이 거의 배제된 음식들만 반 강제적으로 섭취하다 보니, 약을 먹느라 안 먹던 아침까지 세끼 꼬박을 먹는데도 살이 조금씩 빠진다. 그런데 나의 '장'은 이 상황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그 어떤 연인과도 방귀를 틀 생각이 없는 난, 가스가 자꾸 차오르는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소화가 어려운 편이라 식이 섬유니 효소니 하는 것들을 잔뜩 사다 놓고 먹어야 하는 그가 평소엔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나의 소화 능력이었는데. 소화시킬 것이 없어 가스가 들어찬 내 위와 장은 밤이 깊을수록 요상한 소리만 내며 단단해져가고 있었다.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하는 날 위해 끓인 물에 생수를 조금 섞어 가져다주고, 온수를 넣어 사용하는 찜질기도 물을 채워 배에 얹어놓고도,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 에이 괜찮아. 그냥 좀 불편한 것뿐이야~
웃음소리를 섞어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는데도, 속이 더부룩해 눕지도 못하고 침대에 던져둔 것처럼 스러질 듯 앉아 있는 날 보며 그의 안색은 쉬이 나아지질 않는다. 그리곤 기어이 내 옆으로 와 앉아 오른손으로 목 아래 등을 받치고, 왼손으로 내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기 시작한다. 양손을 다 사용하지만 힘이 조금 더 좋은 그의 왼손이 야무지게 움직이며 배를 조몰락거리니, 금세 좋아지는 것 같다. 사실은 그냥 그의 온기가 좋은 거라는 걸 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불편함이 그의 따스함으로 천천히 물들어 옅어지고,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머리가 무거워지며 눈이 스르륵 감긴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고요한 새벽,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엷은 가로등 불빛에 눈이 뜨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숙면을 취했다. 지금 눈을 뜨고 이 까만 방의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내가, 꿈 쪽인가. 멍한 체로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눈을 비비느라 잠깐 부스럭거린 이불 소리에 그 사람이 꼼지락거리며 잠에서 깨어난다.
- 좀 괜찮아? 왜 깼어, 아직도 많이 불편해?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신 듯 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가 손으로 더듬더듬 내 얼굴을 찾아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고, 졸음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무의식 중에 깊은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응, 괜찮다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나도 모르게 콧소리가 잔뜩 섞여 나왔다. 그런 내 머릴 꼭 끌어안고 토닥거리며 '다행이다, 다행이다' 반복하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나도 목소리의 크기를 따라 점점 꿈속처럼 몽글거리는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