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년십일월열셋째날
골목을 돌아 돌아 한참을 걸었다
싸늘한 공기에도 목에 닿은 코트의 옷깃에
축축하게 땀이 베였다
가야 할 곳은 찾지 않고
자꾸만 길 곁에 앉은 고양이와
찬 바람을 맞고 선 헐벗은 화분들만 눈에 담는다
쉬이 찾아지지 않는 목적지를 잊은 척
한눈을 팔고 마는,
그런 마음이 되어버리는 날들이 있다
길을 잃은 것에 맞먹는 두려움에 바들거리는 마음을
알아채면 무너져 내릴까,
못 본 체 놓아두는 그런 날들 말이다
몇 집을 더 지나 돌아선 모퉁이에서
밀려들듯 불어오는 바람의 무리를 마주친다
근처 카페의 커피 볶는 냄새와
어느 집의 이른 저녁 식사일 김치찌개 냄새가
뒤섞여 코에 묻어나고
갓 스물이 되었을까, 자지러지는 소녀들의 웃음소리도
멀리에서 날아와 아련하게 귓가에 닿는다
그렇게
온 동네의 이야기를 품은 바람이 모이는
길목에 서서
나의 목적지 따윈 크게 상관치 못하고
살아 숨 쉬는 향기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 동안 골목길을 서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