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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Aug 16. 2020

열심히 키우고, 열심히 죽이자.

이번 장마에 키우던 식물을 여럿 보냈다. 율마, 이름 모를 제라늄, 이름 모를 다육 식물까지. 매일 관찰하고 확인하며 돌보았지만, 그들의 시듦을 막지 못했다. 잎은 노랗게 변했고, 줄기는 검게 변했다. 수분을 머금지 못한 잎은 생기를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혹시 물이 부족한 걸까? 물을 주면 살아날까? 화분 한가득 물을 주어 보았다. 하지만, 화분의 수분은 마르지 않았고, 새하얀 곰팡이만 가득하게 만들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빛이 부족해 인공 조명도 매일 쐬어 주었다. 물도 제때 주었다. 하루에 두 번, 꼼꼼히 관찰하고 문제없나 살폈다. 하지만, 식물은 내 마음과 달리 조금씩 시들어 갔다. 쳐지는 잎과 검게 변하는 줄기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장마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공기 중의 습도를 생각지 않고 이전처럼 식물을 대했다. 비슷한 주기로 물을 주고 인공조명을 쐬어 주었다. 그들은 분명 내게 어떤 표시를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왜 시들지? 잎은 왜 이렇게 쳐질까? 줄기 색을 왜 이렇지, 목질화 되나? 하고 의문만 가졌을 뿐, 깊게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식물은 정직하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표현한다. 잎이 마르기도 하고, 쳐지기도 하고, 색이 변하기도 한다. 간혹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표식을 남긴다. 식물의 변화를 알아채고 빠르게 대처하면 좋겠지만, 나 같은 초보 가드너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애정을 가지고 유심히 들여다봐도, 문제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화원에서 집으로 식물을 데려올 때만 해도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작은 식물이 새싹을 틔우고 키가 크는 상상만으로 즐거워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 작은 녹색 이파리에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화원에서 집으로 환경이 바뀌었지만, 특별히 문제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푸르름은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다. 물만 제때 챙겨줘도 쉽게 잘 자라는 줄 알았다. 무지했다. 식물마다 필요한 볕과 물의 양과 바람의 필요 정도는 다른데, 모두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식물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화원에서 자랄 때와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제공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전에 비해 열악하다. 빛도 부족하고 물 주는 시기도 일정치 않다. 적절한 비료와 바람의 양도 조절하지 못한다.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리 없다. 사람도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듯 식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식물을 키우는 사람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밖에 비가 내리는지, 해가 뜨는지 체크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줘야 한다. 장마처럼 오랫동안 비가 내리면, 물 주기는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그리고 선풍기를 켜서 잎의 습도를 적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볕이 부족하면 인공조명을 쐬어준다. 해가 뜨면 가능한 해를 많이 볼 수 있도록 화분을 옮긴다. 식물은 기본적으로 해를 보고 자라기 때문에 해를 싫어하는 식물은 없다. 다만, 너무 뜨거운 햇볕에 오래 노출하는 것도 싫어하는 식물이 있다. 이런 식물을 직사광에 너무 오래 노출하면 잎이 타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만약, 어떤 식물에게 어떤 환경이 맞는지 모르겠으면, 그 식물이 원산지를 알아보면 좋다. 예를 들어, 고온다습한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은 빛과 물을 좋아한다. 이런 식물은 물을 자주 줘서 다습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추위에 노출되지 않도록 적정하게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또한 올리브처럼 지중해에서 자라는 나무는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필수다. 최대한 해를 많이 보여주고 바람을 많이 쐬어줘야 한다.




장마에 몇몇 식물은 운명을 달리했지만, 내게는 아직 돌봐야 할 식물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그새 또 새 식구를 들였다. 그래서 더 이상 과습으로 말라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스마트폰을 열어 자주 방문하던 식물 카페에 접속했다. 그리고 장마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다. 예상대로 많은 문의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겉흙이 말랐지만 습도가 높은데 물을 줘야 하나요?’, ‘제라늄이 무르고 있어요. 어떡하죠?’, ‘흙이 마르지 않아요’, ‘축축한 화분에서 벌레가 생겼어요’ 등.

오랫동안 카페에서 정보를 모아 내린 결론은 바로 바람이었다. 나는 볕과 습도만 생각했지, 바람은 생각지 못했다. 평소처럼 창을 열어 바람을 쐬어주면 좋겠지만, 바깥의 습한 공기가 더 해로울 것 같았다. 습기로 가득 찬 공기는 식물을 과습하게 만들었다. 줄기를 무르게 만들었고, 뿌리를 썩게 했다. 나는 카페에서 배운 대로 에어컨, 제습기, 선풍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에어컨과 제습기로 집안의 습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선풍기를 식물에게 직접 쐬어 주어서 습기를 머금은 이파리를 말려주었다. 출근할 때도, 잠들기 전에도 타이머를 맞춰두고 바람을 쐬어 주었다.

나는 죽어가던 식물들을 살려 낼 수 있었다. 조금만 빨리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대처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또 괜히 생명을 들였구나 싶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시들어 버린 식물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많은 애정과 관심으로 이전의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들어버린 식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식물도 생물이다. 표현과 관계 맺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엄연히 하나의 생물이다. 그런 식물을 죽이는 일은 어찌 보면 잔인하다. 그래서 처음 식물이 죽었을 때, 죄책감에 시달리며 다시는 식물을 들이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하지만, 한번 식물에 빠진 사람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길을 가다가도, 어떤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식물만 눈에 보이고 관심이 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다시 식물을 들여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초보 가드너가 식물을 죽이는 건 당연하다. 지식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처음부터 잘 키우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신, 죽어가는 식물은 초보 가드너에게 어떤 배움을 선물한다. 식물을 시들게 만들었다는 쓰라린 경험이 다른 식물을 죽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번져간다. 식물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배운 절실한 경험은 남겨진 식물과 다시 들여온 또 다른 식물이 살아갈 양분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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