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를 위한 변명
Bad workman always blames his tools.
우리말로 치면, “훌륭한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도구보다는 성실함, 마음가짐, 실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동네 산만 오르면서 히말라야에서나 필요할 듯한 재킷을 입고, 사진 찍는 횟수보다 렌즈 구매를 위한 클릭이 더 많다. 유튜브 시작하겠다고 영상 하나 없이 풀 세트로 장비를 장만하고, 요가하겠다고 10만 원 넘는 요가복과 매트부터 찾는다. 시작하기 전부터 장비에만 몰두하는 ‘장비충’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선, 키보드. 아무 거나 사용할 수 없다. 오랫동안 타이핑하려면 손목과 손가락이 건강해야 하기에 해피해킹이나 리얼포스(둘 다 무접점 키보드 대표 브랜드, 20만 원이 훌쩍 넘는다) 정도는 써야 한다. 메모장이나 구글 드라이브 같은 무료 편집기는 취급하지도 않는다. 한 달에 몇 천원은 내야 하는 율리시스(Ulysses)나 베어(Bear) 같은 유료 편집기를 필수로 구독한다. 생산성과 퀄리티에 얼마나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사용하고 본다. 노트북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 윈도보다는 뽀대 나는 맥북이 좋겠다(같은 성능이면, 맥북이 훨씬 비싸다). 그리고 아이패드도 하나 장만하자. 이왕이면 프로가 좋겠다. 주말에 카페에 가져가기엔 맥북은 너무 무겁다.
아이패드 프로 4세대를 샀다. 근데, 원래 사려던 건 아니었다. 이미 에어 3세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성능 때문에 기변을 고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에어 4세대 출시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프로와 흡사한 외관, 프로보다는 저렴한 가격, 이거다 싶었다. 내 앞에 놓인 에어 3세대가 초라해 보였다. 3세대도 꽤나 하이엔드 급이고, 3~4년은 무난하게 사용할 만큼 괜찮은 성능이다. 하지만, 이미 떠난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결제 버튼을 누를 기세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에어 4세대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고, 출시일도 미정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애플 홈페이지를 방문하며 출시일을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출시일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출시일 미정 상태였다. 좀 더 기다려 볼까 싶었지만, 기다림을 모르는 성격 덕에 결국 손에 쥔 것은 프로 4세대. 에어보다 비싸지만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를 조금 보탰다. 비싼 가격은 덤.
아이패드는 2세대부터 꾸준히 사용했다. 그동안 아이패드는 영상을 보거나 게임 또는 웹서핑 용도로 가끔 사용하는 기기였다. 사용 빈도가 많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은 책상 어딘가 처박혀 있었다. 딱 그 정도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데, 애플에서 출시한 스마트키보드폴리오(이하 키보드)가 내 패드 사용 패턴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아이패드와 키보드의 조합은 글 쓰기 용도로 딱이었다. 맥북도 있지만 들고 다니기는 부담이었고, 핸드폰으로 쓰자니 오타 수정만 한세월이었다. 들고 다니기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 나쁘지 않은 키감, 애플의 iPadOS(아이패드 전용 OS, 참고) 등. 아이패드는 글쓰기 도구로 점점 발전했고,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도구가 되었다.
사실 글 쓰는 데 있어, 에어 3세대나 프로 4세대는 큰 차이가 없다. 글쓰기는 더 빠른 CPU와 더 많은 RAM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상 편집이라면 몰라도, 편집기에서 타자를 두드리는 정도로 기기간 성능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프로 4세대만 제공하는 획기적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두 기기는 기본적으로 하이엔드급 기기인 데다,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을 무리 없이 사용 가능하다. 차이점이라고는 프로가 더 아름답고, 더 비싸다는 것뿐.
다음에는 또 어떤 도구에 투자할까 기웃거려본다. 이번에는 글쓰기 앱이다. 오랫동안 사용한 애플의 메모 앱이 불편하지는 않다. UI와 편의 기능이 좋다 말하긴 어렵지만, 기본 기능에 충실하고 기기간 연동이 빠르다. 어차피 메모 앱에서는 초안만 작성하고 브런치나 VS Code(개발용 편집기)에서 발행하기 때문에 더 많은 기능이 필요하진 않다. 그럼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써보고 리뷰를 찾아보면서 결제할 시기를 가늠해본다. 아마도 다음 글은 새로 구매한 앱에서 쓰고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새로운 도구에 투자하는 것은 단지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부수적 산물이다. 핵심은 자기만족에 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도구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고 싶으니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사고, 사용해보고, 역시 잘 샀구나 생각하며 자기 만족감을 높인다.
글이 써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로 가득할 때,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새로 산 기기, 새로 산 어플을 열어보자. 당장에라도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효력은 짧다. 다시 쓰기 시작하면 곧, 잠깐의 행복이었구나 깨닫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 잠깐의 시간들, 다시 쓰기를 결심하는 그 시간들이 결국 글쓰기를 이어가는 힘이 되어 준다.
아이패드 샀다는 변명을 참 길게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