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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Nov 02. 2020

마음껏 흥얼거릴 수 있는 삶

월요일 아침. 채 가시지도 않은 주말 피로에 힘겹게 눈을 떴다. 또 시작이구나. 하루는 분명 24시간으로 같은데 주말은 왜 이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월요병이 있는 것도,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은 유독 힘들다. 습관처럼 커피를 내리고 빵을 집어 들었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카페인 때문인지, 커피 마시는 행위 때문인지 몰라도 흐릿했던 의식은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늦었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유연근무제를 시행하는 회사라 늦게 출근해도 상관없다. 늦게 퇴근하거나 다른 날 추가로 근무 시간을 채우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늦으면 왠지 모르게 쫓기는 기분이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잘못한 것만 같은 느낌. 어쩌면 오랫동안 채득해온 규칙적인 생활(학교라든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2시가 넘어 잠든 딸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내가 깨우기 전까진 일어날 리 없었다. 늦었지만,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깨우기 미안해진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부랴부랴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까지는 운전해서 가야 한다. 집 근처 어린이집이면 좋겠지만, 맞벌이인 우리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고 시설도 좋다. 게다가 지원금도 많이 받는다(이게 최고). 아이를 보내고 회사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 하나로 회사에 도착하면 좋겠지만, 지하철로 다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갈아타는 게 불편할 따름이다. 버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달리듯 걸어갔다. 일찍 나왔다면 여유 있게 갔을 텐데, 늦으니 항상 이모양이다. 몸에서는 서서히 땀이 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정거장으로 내려가는 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 지하철이 방금 지나갔나 보다. 아.. 하고 탄식이 나왔다. 사실, 몇 분만 기다리면 다음 지하철이 올 텐데, 놓쳐버린 지하철을 타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걷지 말고 뛸걸. 체념하듯 터벅터벅 정거장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정거장 맨 앞으로 걸어갔다. 지하철 1번 칸을 타기 위해서다. 타고난 성격인지 1분이라도 빨리 회사에 도착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제일 빠르게 나갈 수 있는 칸에 탄다. 다른 칸에 타면 훨씬 여유로울텐데, 단 1분이라도 아끼려고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노래 부르는 소리 같았다. 소리가 크지 않은 거 보니,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는 듯해 보였다. 미세하게 들리던 소리가 이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바로 옆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옆에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 하얀색 강아지가 들어있는 가방(인형이던가..), 불안한 듯 반복된 흔들거림, 어딘가 장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계속 부르겠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기분인데, 그런 소음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을 내려 회사로 걸어가는 길. 문득 행복에 대해 떠올렸다. 조금 전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그 사람과 나,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안 좋은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하거나 불쌍히 여겼다. ‘저 사람도 내가 그렇게 느끼듯, 자신을 불행히 여기겠지?’, ‘내가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 사람은 못하니 당연히 그럴 거야.’ 같은 식으로 생각했다. 당시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행복하다’라는 사실에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사람을 보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늦어서 쫓기듯 땀이 나게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내가 과연 그 사람보다 나을까? 남들이 볼 때 어떨진 몰라도,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릴 수 있는 그가 왠지 모르게 나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우리는 간혹 혹은 언제나, 행복의 조건에 대해 착각하며 살아간다. 더 많은 월급과 더 넓고 좋은 집. 그리고 더 비싼 차와 더 좋은 옷. 이런 외적인 요인을 행복의 조건인 것처럼 오해한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되고 싶은 것에 더 집중한다. 내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중요치 않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거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척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외적인 것에서 만족을 얻는 사람은 행복(이라고 착각하는)의 지속시간이 짧다.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더 많은 월급을 원한다. 아무리 좋은 집에 이사 가더라도 또다시 더 좋은 집에 살기를 원한다. 좋은 차를 타고 있어도 지나가는 더 좋은 차를 보고 부러워한다. 그들이 원하는 종착지가 어디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곳에 도착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행복은 내면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체로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다. 행복을 바깥에서 찾는다는 것은, 마치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행복을 문 밖에 두고 가는 것과 같다. 행복의 제어권이 밖에 있으니 아주 작은 바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상사의 불쾌한 언행, 친구와의 작은 다툼 같은 일시적 문제에 쉽게 마음이 휘둘린다. 늦잠을 자거나 지하철을 놓치는 것 같은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반면에 내면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변화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외적인 것에 크게 괘념치 않기 때문에 언제나 여유있다. 불쾌하게 만드는 상사도, 무례하게 선을 넘는 회사 동료에게도 관대하게 행동한다.


지하철로 돌아가 보자. 옆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렸던 그 사람.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눈치 보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까? 아니면, 늦잠에, 만원 버스에, 놓쳐버린 지하철에, 땀에 젖은 셔츠에 쉽게 짜증 내던 내가 행복한 사람일까? 내가 과연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논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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