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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Jan 23. 2022

커피를 마시는 가장 완벽한 방법

#1

15년 전 겨울, 스페인 그라나다로 기억한다. 돈 없던 학생 시절, 단 1유로라도 아끼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새벽을 보낸 적 있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밤 버스는 새벽 4시가 되어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시내버스도 다니기 전이었고, 택시 탈 만한 여유도 없었다. 걸어 다닐만한 체력도 없었다. 소매치기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밤을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한번 당했던 터라 더더욱 날이 서있는 상태였다.


침대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피곤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없는지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보냈다. 터미널 한쪽 벽의 큰 시계를 보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에는 간간히 시내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찾아볼 겨를도 없이, 처음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잠깐 꾸벅 졸았는지, 버스 밖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멀리 알함브라 궁전이 보였다. 서둘러 하차벨을 눌렀다. 어딘지 모르지만, 알함브라 근처라면 목적지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다. 예민한 상태로 새벽을 보냈더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역시 카페.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문을 연 곳이라곤 허름한 동네 카페뿐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을 곳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리저리 젤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0.99유로(가격도 정확히 기억한다) 짜리 커피와 이름 모를 빵을 하나 시켰다.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카페 주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드립 커피와 빵을 내놓았다. 대량으로 내린 싸구려 커피는 아무리 봐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커피 질을 논하는 것은, 당시의 내게 사치와 같았다. 나는 아무 기대 없이 잔을 들어 홀짝 들이켰다. 씁쓸하고 따뜻한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음료였던가?


장담컨데, 여행 중 마신 가장 훌륭한 커피 한 잔이었다.



#2

무더운 여름 오후 3시, 밖에서 해를 마주 보고 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셔츠 안으로 땀이 흘러내려 온몸이 끈적인다. 대한민국의 여름은 어찌나 후텁지근한지, 누구 하나 잘못 건드리면 짜증이 폭발할 것만 같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뒹굴거리는 게 최고다. 왜 한 여름 도심을 걸어 다닐까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일이 언제나 마음 같지는 않다. 예상치 못한 일은 늘 있는 법이다.


일을 마치고 잠깐 여유가 생기면, 고민할 것 없이 카페로 향한다. 시간을 보내기에 카페만 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 아담한 동네 카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든 상관없다.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한다. 앉을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다.


문을 열고 들어가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아아)를 주문한다(예외는 없다). 시원한 공기, 잔잔한 음악, 차가운 아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얼음 가득 유리잔 채로 절반의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켠다. 카페인이 세포 하나하나에 전달되는 것이 느껴진다. 힘든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다.



#3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지만,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구석에서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하는 사람, 삼사오오 모여 수다 떠는 사람, 데이트하는 사람, 혼자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사람, 더위를 피해 잠깐 들른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사실, 카페는 커피 맛보다 공간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카페의 퀄리티는 크게 보면 좌석배치, 조명, 음악이 얼마나 조화롭냐로 결정된다.


공간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리스타와 마주치지 않게 분리하는 것은 필수다. 직원 눈길이 자꾸 느껴진다면, 단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갈 것이 틀림없다. 테이블 사이는 충분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시야를 가릴만한 적당한 차폐도 필요하다. 화분이 좋은 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차단하면서 쾌적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화분만큼 좋은 장치는 없다.


조명은 개인적으로 약간 어두운 게 좋다. 백색 전구보다는 따뜻한 느낌의 주광색 조명이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간접 조명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음악은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야 한다. 가사 있는 대중가요보다는 소프트한 Instrumental Music(가사 없는 음악)이 좋다. 아는 노래가 자꾸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 혼자라면 모를까, 동행이 있다면 그다지 달가운 환경은 아니다.


적당히 격리된 테이블, 살짝 어두운 조명, 들릴 듯 말듯한 조용한 음악이 흐르면 비로소 카페라 정의할만한 공간이 완성된다. 이런 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내게는 가장 완벽한 휴식이 된다.



#4

해뜨기 전. 아직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 없는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뜨면 왠지 기분이 좋다.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심히 밖으로 나온다. 아직 바깥은 깜깜하다. 식탁 등만 켠 채, 어두운 거실에 혼자 앉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내리기 위해 캡슐을 넣는다. 캡슐이 눌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30초쯤 지났을까. 까만 커피 위에 갈색 크레마가 살짝 층을 이룬다. 따뜻해진 머그컵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온몸으로 그 온기를 받아들인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시간차를 두고 조금씩 커피를 삼킨다.


TV도, 음악도, 유튜브도 켜지 않는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리, 통화하는 사람의 커다란 목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회의하며 싸우는 소리, 쉴세 없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없다. 커피를 마실 때 나는 호로록 소리가 주변의 유일한 소음이다. 고요하다. 이윽고, 거실에 해가 조금씩 들이치기 시작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완벽하게 아침을 맞이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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