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부 사정으로 3개월이라는 인내의 시간이 지나서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주말에도 밖에 나온 적은 많았지만 평일 낮에 한가롭게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짜릿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평일 휴가를 지내보니 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직장을 다니시는 분들은 이 마음 다 공감할 것이다.)
휴가 덕택에 전 직장에서 점심때마다 나만의 아지트 공간으로 삼던 카페에 갈 수 있었다. 카페 사장님은 작가셨는데 오랜만에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반갑게 맞아주셔서 기분이 들떴다. 누군가가 반갑게 맞아준다는 따뜻한 감정을 느끼면 온 몸에 온기가 확 돈다. 최근에 작가님께서 카페에서 영화 감상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시면서 함께 보셨던 영화를 알려주셨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 <이삭을 줍는 사람들과 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라는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상이었다. 요즘에 긴 영상을 볼 때 키보드 오른쪽 화살표 키를 누르며 스킵을 연달아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느긋하게 영상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았으니까.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줍는다는 행위의 연결고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팔지 못하는 폐기된 감자를 줍는 사람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줍는 사람들
또는 쓰레기통에 있는 물건을 주워서 생활하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
썰물 때에 맞춰 바닷가 양식장 근처에서 굴을 줍는 사람들
버려진 포도밭에서 포도를 줍는 가족들
시장이 파하고 나오는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아무거나 줍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의 규칙을 지켰다. 과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잘 골라서 주웠다. 자신만의 소신도 있었다. 인간의 과소비로 인해 버려지는 것들로 죽는 동물들을 안타까워하고 버린 것들에 대해서 멍청이들이 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버려진 음식들 중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 주워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과 나눠 먹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남은 과일을 나눠주기 위해 따갈 나무를 남겨두는 과수원도 있었다. 이들은 낭비를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파리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벽 4시에 출발해서 6시쯤 파리에 도착해서 아침 6-7시쯤 제과점에서 버리는 전날 만든 빵을 주워서 주식으로 삼고 시장에 버려진 야채들을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한다. 이 사람은 생물학을 전공해서 보조교사 일을 하고 있다. 석사 학위까지 딴 고학력의 사람으로 밤에는 이주민들이 사는 쉼터에서 이주민들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상보두앙의 이삭줍는 사람들'을 꺼내는 빌프랑슈 미술관 사람들
마지막에 '상보두앙의 이삭줍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의 그림이 나오는데 절묘하게 그림을 실외로 꺼내는 사람들에게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바람과 맞서 싸우는 그림의 분위기와 비슷한 모습이 나왔다. 그림 속 사람들의 모습은 생존이 달린 줍는 행위라서 그런지 사뭇 전투적이고 강렬했다. 영상을 보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당당함이 계속 떠올랐다.
음식을 줍고, 쓰레기를 줍고 더러운 것을 줍는 사람을 주변에서 좋게 보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상에 나온 사람들은 각자의 소신과 신념이 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관철해 나간다. 내게 필요한 것만 사서 소비한다면 무언가 줍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나 요즘은 내게 필요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은 별로 없는 듯하다. 나 또한 그런 모습이 없다고 할 순 없으니...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 중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내가 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싼 값에 파는 문화가 잘 되고 있는 건 좋은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치는 않지만 허리 숙인 그 모습이 이 배부른 사회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도시나 시골에서 뭔가를 줍는 사람들이 있다. 부끄러움이나 걱정 따위는 없다.'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인데 배부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허리를 숙이기보단 고개를 쳐들고 나만의 권리를 주장하기 바쁘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 권리를 이용해서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정당한 권리는 당연하게 지켜야겠지만 지나친 권리는 주변에 독이 됨을 모르는 걸까.
2000년에 나온 영상이고 그때보다 20년이 지난 지금 격차가 더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지지 않는 빈부격차 사회에서 영상에 나온 사람들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줍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