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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un 20. 2019

그게 우리 집이다

  또 이층 거실로 이사를 했다. 날씨가 추워진 것이다. 이삿짐이라야 이부자리 뿐인 간단한 이사다. 처음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이부자리를 옮길 때만 해도 길어야 몇 년일 줄 알았다.

  처음 새집을 지어 이사를 했을 때는 참 뿌듯했다. 꿈에 그리던 이층집을, 그것도 신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산기슭에 떡하니 지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딸아이는 ‘야 이게 우리 집이라니!’ 하며 팔짝팔짝 뛰며 아래위층을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해가 거듭되자 집안 곳곳이 고장이 나고 잘못된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축회사 사장이 자랑스럽게 설계도를 보여주었을 때부터 집 모양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다. 그렇지만 건축에는 완전 문외한이었던 터라 그래도 집을 다 지어 놓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집은 설계도 모습 그대로 지어지고 있었고 좋은 집에 대한 환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원체 싼값에 집을 지었던 터라 그림 같은 집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영 마뜩잖았다.

  우리 집 주변에 하나 둘 새집들이 들어서면서 우리 집은 주변 집들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가 되고 있었다.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한 동네라고 소문이 나면서 골목은 구경꾼들로 북적였지만 우리 집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국 차들이 동네를 들락거리고 많은 집들이 드라마 세트장이 되었지만 우리 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좋았다. 봄이면 동네는 꽃 천지가 되었고 아침마다 새들이 잠을 깨웠다. 여름이면 뒷산은 물론 길거리까지 울창한 숲길로 바뀌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아름다운 이웃집들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 집을 지켰다. 외양은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로는 그만인 집이었다. 여름에는 햇볕과 비를 막아주었고 겨울이면 찬바람을 막아주었다. 마당 귀퉁이에는 자그마하지만 채마밭도 일구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겨울나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거실에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될 정도로 집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려면 온통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도 담요를 덮어야 했다. 밥을 먹는 일은 더더구나 큰일이 되었다. 텔레비전은 안 봐도 그만이지만 밥을 먹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집안이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한 것은 집이 낡기도 했지만 난방비가 무서워지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부터 난방을 따뜻하게 하고 살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게 춥게 사는데도 도시가스 요금은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혹간 찾아온 손님은 이렇게 추운 데서 어떻게 사느냐며 채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고는 했다.

  이런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이층은 아주 따뜻했다. 햇살이 잘 들었고 난방을 조금밖에 하지 않아도 바닥은 따뜻했다. 추위를 견디다 못한 아내가 이층으로 피난을 가자고 했다. 아이들이 쓰는 이층 방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거실 바닥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아래층은 난방 배관이 얼지 않을 정도로만 실내 온도를 낮추고 그렇게 이층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층으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밥 먹는 것이 문제였다. 주방이 일층에 있어 식사 준비는 어쩔 수 없이 아래층에서 해야 했지만 밥까지 떨면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아예 이층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온몸을 꼭꼭 싸매고 목도리로 중무장을 한 아내가 아래층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끝내면 아내와 함께, 때로는 아이들과 같이 밥과 반찬을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층으로 날라 밥상을 차렸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하던 때 그랬듯이 밥상은 신문지가 대신했다. 처음에는 번거롭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곧 익숙해졌고 아이들은 재미있다며 깔깔거리곤 했다. 피난민처럼 신문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보다 옹색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오붓하고 정겹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추위에 떨지 않고 따뜻한 바닥에 느긋하게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퍼질러 앉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겠는가.

  이층 마루로 이사를 오고부터 딸아이는 수시로 마루로 나와 이불 속에 다리를 집어넣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아들 녀석도 제 방을 놔두고 좁은 거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몸을 눕히기도 했다. 녀석들의 제안으로 거실이 때로는 주방이 되기도 한다. 신문지 식탁에는 시원한 대구탕이 오르고 샤브샤브가 오르기도 한다. 딸아이가 저만의 요리라고 할 파스타나 피자, 감바스를 올릴 때는 이층 거실은 레스토랑이 된다. 딸아이가 이러한 서양식 요리를 제안하면 아내는 딸이 눈치 채지 않게 내게 눈을 벅인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신호다. 마룻바닥에 퍼질러 앉아 삼겹살을 굽고 대구탕을 먹고 샤브샤브를 끓이고 파스타를 감바스를 요리하는 재미를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아들 녀석도 이런 자리와 식탁을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처음 이층으로 이사를 할 때만 해도 두, 세 해 정도 이런 불편을 감내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사를 오고 한 20년쯤 지나 주변 집들의 주인이 바뀌면서 그 아름다운 집들이 헐리고 새로 지어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그렇게 새로 집을 지을 날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라기보다 남들 다 하니까 우리도 당연히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겨울이면 이층으로 이사를 하는 생활을 10년 가까이나 계속하고 있지만 언제 이 노릇을 벗어날지 막연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때가 좋았었다고 말할 때가 있으리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단열이 아주 잘 되는 그런 집을 짓고 살 그 날을 기대하며 그 날을 기다리며 산다. 상상 속에서 고대광실을 짓든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허물었다가 새로 짓든 그건 내 맘이고 내 자유 아니겠는가. 긍정은 또 다른 긍정을 부른다지 않는가. 누가 내 이 소박한 바람을, 소망을 탓하겠는가. 그 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며 살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오순도순 정겹게 살고 있는 집, 그게 우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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