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내를 차에태우고 동네 가게에 김치걸이를 사러 갔다. 동네 가게가 대형 마트보다 싸다고 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실제 싸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배추와 열무, 얼갈이배추에 무까지 사고 파와 양배추도 샀다.
포기김치에 양배추김치, 열무김치까지 담그려는 모양이다. 밥 먹을 때 김치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제는 김치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는 배추와 열무, 양배추를 다듬고 파를 까고 이것들을 소금에 절이고 김치 속을 만들어 양념에 버무렸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보다가 슬며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마늘이나 찧어 줄까 하고 물었다. 아내는 아주 반기는 기색이었다. 마늘 찧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 세게 찧으면 마늘이 공중으로 튀었고 너무 힘을 주지 않으면 제대로 찧어지지가 않았다. 마늘을 다 찧고 나자 아내가 조금은 미안해하며 이것저것 몇 가지 잔심부름을 더 시켰다.
소금에 절여진 김치걸이를 씻고 김치 속 만들기를 끝낸 아내는 김치 담그기를 중단하고 점심을 지었다. 얼갈이배추로 배춧국을 끓이고 고추 찜도 만들었다. 단 둘이 오붓이 앉아 밥을 먹기는 참 오랜만이다. 배춧국에 밥을 말아 고추장을 풀어 고추 찜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아내는 김치 담그는 일을 계속했다. 김치 담그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늘 다 된 김치를 먹기만 했지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밥상에 오르는 지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이만 저만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생색도 내지 않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양 능숙하게 김치 담그는 아내가 새삼 다시 보였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기가 미안했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것을.
김치 담그기를 끝낸 아내에게 커피 한 잔 타줄까 물었다. 아내는 반색을 하며 그렇지 않아도 부탁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한 숟갈 넣고 설탕을 넣었다. 커피 쟁반에 커피 잔을 놓고 쟁반까지 받쳐서 아내 앞에 놓았다. 황송스럽게 쟁반까지 받쳤느냐며 아내는 고마워했다.
커피는 좀 싱거웠다. 그리고 너무 달았다. 아내나 아이들이 타줄 땐 참 맛이 좋았는데 내가 탄 커피 맛은 왜 이 모양이람. 커피 타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아내는 맛있다며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운전도 해 주고 커피도 타주고 마늘도 찧어 주는 남편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참 좋다고 아내는 말했다.
여름내 비가 와 햇빛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매일 내리는 비에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더위는 모르고 여름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름 휴가계획 짜기에 바빴던 것 같다. 지인들이나 친구들은 전화할 때마다 휴가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맨날 휴간데 뭐 새삼스럽게 휴가를 가느냐고 너스레를 떨고는 했는데 아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늘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내였기에 놀러 가는 일이나 몸치장 같은 건 무신경한 아내였다. 덩달아 나까지 아내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가을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기 까지 하다. 새벽녘엔 이불이 생각날 정도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아내와 조용히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에서 아내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음악이나 미술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온 가족이 함께 다녀온 유럽여행을 이야기할 때면 아내는 늘 꿈을 꾸는 듯 행복해 했다. 음악이나 미술 여행을 해봤으면 하는 눈치지만 아내는 결코 말은 하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면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SNS에는 해외여행 사진이 잔뜩 올라오고 만나는 사람들은 해외여행 얘기에 열을 올린다. 그럴 때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니 국내 여행이라도 며칠 다녀오자고 말해 볼까? 아니면 언젠가 울릉도를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울릉도는 어떨까? 한가하게 놀러 다닐 궁리나 한다고 핀잔이나 듣지 않을지 모르겠다. 아이들 걱정에 가려고나 할까? 그러나 어쨌든 시도는 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