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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도바다 Dec 11. 2021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조금은 불편한 가족 이야기]

'가족'이란 단어로 글을 쓸 때는,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어느 시점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까지 써내려 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묵직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마도, 아직 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렇다.

흔히들 나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안 겪은 일이 없다 말하지만, 가족이야 말로 안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살았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잊고 지냈던 일들이 켜켜이 쌓이고 싸여 결국엔 곪아 터져야 비로소 '우리가 가족이었구나'하는 신파는 어느 집에나 흔히 있는 일이다.  





겉으로는 즐겁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화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연예인 부부도 앞에서는 잘 살고 있다 하지만 각자 차로 이동하고, 얼마 후에는 이혼기사가 종종 나온다. 화려한 모습에서 바로 뒤로 세발자국만 걸어도 보이지 않는 그늘은 늘 존재하듯 겉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 다 행복한 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좀 특별하다. 엄마가 내 나이 7살 때 돌아가셨고, 아빠는 군인이셔서 텔레비전을 볼 때, 항상 애국가가 나오면 일렬로 서서 4절까지 가슴에 손을 얹어 부르게 했고 국민교육헌장도 외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새엄마를 가족으로 맞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기억에 큰언니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살림을 거의 도맡아 했다. 큰오빠와 중학생인 작은언니도 여러 상황에 대한 불안과 불만, 군인 아빠의 발령으로 전학도 여러 번하며 형제들의 사춘기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혼란과 부족이 공존한 세대로, 키우다 보면 내 뱃속으로 낳은 자식도 미울 때가 있는데 낳지도 않은 자식들이 예쁠 리가 없다. 결국 새엄마는 별거를 시작했고, 얼마 후 아빠는 우리 형제들만 남기고 새엄마를 따라갔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어린 마음에 그렇게 사는 건지 알았다.


시간이 지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서로 생일 때나 명절 때면 화목한 가족처럼 지내왔다. 하지만 상처 난 곳은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시 터지게 돼있다. 작은언니 결혼 혼수 문제로 서로의 목소리가 커졌다.  물론 언니가 아니고 아빠와 나는 아주 크게 싸웠다. 그 이후로 아빠 얼굴도 보지 않았절대로  말도 섞지 않았다. 아빠를 믿었던 만큼 서운함도 컸기에 내 행동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난 언제나 그렇듯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릴 때 우릴 버리고 간 아빠와 새엄마한테도 최선을 다해왔다. 어버이날이나 생일, 명절날 바리바리 선물하며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는데, 아빠는 형제 중 첫 스타트를 끊은 언니 결혼에 그렇지 못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도 자식들한테 해야 하는 도리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전혀 자식들한테 풀려고 하지 않는 인색한 모습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지금 아빠는 여기에 있지 않다. 어느 날 응급실이라며 전화를 받아 가보니 얼굴이 잔뜩 화가 난 불편한 모습으로 의식불명 상태였다. 만 하루 만에 끝내 눈도 못 뜬 채 자식들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렇게 떠났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장례식장에서 2번이나 우황청심환을 마시며 3일을 꿋꿋하게 버텼다.


아빠는 지금 땅속에서 후회라는 걸 하고 있을까.

엄마를 떠오르면 아직까지도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없이 가는 게 삶의 이치인데 혼자서 그 모든 걸 왜 부여잡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세월 앞에는 순서가 없다는데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어렸던 우린 잘 못한 게 없었는데.

아빠는 나를 어떤 기억으로 남겼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맘이라도 실컷 얘기할 곳을 찾다 보니 부모밖에 없었다. 추운 어느 겨울날, 묘지에 찾아가 얼마나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흐느끼며 결국 마지막 말은 '그때 왜 그랬어'였다. 내가 힘들어 찾아갔지만 나한테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는 엄마보다 아빠가 더 미웠다. 지금 내 곁에 없는 '부모'라는 존재만이라도 누군가는 버거워하지만 난, 그 부모가 앞에 있으면 속 시원하게 말을 해보고 싶다. 이제 나도 어느덧 이 세상을 다 알아버린 나이가 됐으니 터 놓고 지난 얘기를 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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