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8주 차 :분노와 사랑

고린도전서 13장 -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 멈추지 않는 사랑.

by 이유진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밤이었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누워있으면서도 달리는 느낌이 들어 도저히 침대에 있을 수가 없어 거실로 뛰쳐나온 밤이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리틀 포레스트 영화를 틀었다. 잔잔한 풍경과 소리들이 마음을 달래주었다. 배를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해댔다.

"우리 아가, 너는 아빠 저런 거 절대 닮지 마!"

남편은 드르렁드르렁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이 날 저녁 식사 시간 때부터 삐그덕, 우리의 균형이 좋지 않았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퇴근 통화에서부터 목소리에 긴장이 잔뜩 묻어있었다.

"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또 시작됐다. 나는 계속 묻고 남편은 계속 같은 대답을 한다. 평소와 다른 호흡, 말투, 표정 모든 것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는대도 여지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참자...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그때 참지 말 걸 그랬다.


이사 온 지 이제 한 달 남짓, 구축아파트에 반셀프 인테리어는 돈을 아껴줄지언정 성격을 나쁘게 만든다.

여전히 손보아야 할 때는 많고 우리 손으로 하나씩 완성해 간다는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자리 잡는다. 임신에 스트레스는 최악이다. 다행히 타고난 성질 중 긍정이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 스트레스보다는 재밌는 에피소드다. 하면서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최면에 빠져 행복해할 때 화장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며칠을 참아봤지만 결국 냄새의 원인은 변기로 밝혀졌고 변기를 다시 뜯어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남편은 이 날 저녁을 먹고 9시가 다 되어서야 변기를 뜯어보겠다고, 냄새를 잡겠다고 장비를 챙겨 요란하게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 아유... 아이씨... 묵직한 한숨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실망과 화가 섞인 묘한 표정으로 나와 장비를 정리했다.

"변기 다 됐어? (전문가를 불러야지)"

"..."

"변기 다 됐어? (어휴...)"

"..."

저 버릇이 또 나왔다. 바깥일에서의 예민과 변기사태의 실패로 인한 예민이 겹쳐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최수종급은 아니지만 다정하다 하면 다정한 편에 속하는 남편이 가끔씩 저럴 때마다 나는 묘한 불안에 휩싸인다. 그 불안은 금세 분노가 되어 날을 세운다.

"지금 나 무시해?" 이 말 하나가 전쟁을 선포한다.

"미안해"

남편은 임신 중인 아내와 전쟁을 하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날은 분노가 날뛰며 남편에게 칼같은 말을 내리 꽂았다. 나를 무시하는거냐며, 그럴 때마다 진짜 사람 미친다며, 내가 왜 당신 눈치를 봐야 하냐며... 이 정도의 깊이까지는 아니었다. 분명 가벼운 열받음 정도였는데 왜 갑자기 거대한 분노가 된 것일까?

그게 잠드는 순간까지도 이어져,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이 모닝 뽀뽀로 얼굴을 비벼대며 출근인사를 하고 나갔고, 나는 평소과 달리 비벼대는 볼을 밀쳐내며 귀찮은 투로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공허한 아침이었다.

아침 루틴대로 사이클을 20 분타고 성경책을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시편을 펼치는 순간, 쳇지피티한테 사랑은 온유하며... 그 구절이 어디더라라고 물으니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라고 한다. 시편을 넘겨,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서 사랑의 구절을 읽었다.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고, 난 전화기를 뒤집어버렸다.



13장 4절~ 8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되...


한참을 들여다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의 얼굴이 그려졌다. 장난기 많은 얼굴로 나에게 한없는 다정을 베푸는 남편의 모습이... 한 번 그런 걸 가지고...

"아가야 아무래도 엄마가 이번에 속이 좀 좁았던 것 같아."

톡을 열어 남편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십분 뒤 온 답장.

"나도 미안해. 어제 일이 좀 안 좋았어. 주말 행복하게 보내자~ 사랑해"

톡을 보자마자 아오... 거봐...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아오!

"그러자! 알라뷰~"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지키려면 삼켜야 하는 말들이 많다. 분노는 잠시지만 사랑은 계속된다. 분노는 상처를 내지만 사랑은 상처를 봉합한다. 분노는 실이지만 사랑은 득이다. 이렇게 또 한 겹 우리 가정이 사랑으로 감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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