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 친정에 갔다 돌아오는데 엄마가 이것저것 음식을 잔뜩 싸주셨다. 보통은 잘 먹겠다 하고 그냥 받아오는데 나도 참...엄마가 꺼내는 장조림 한 다발에 그만 욱하고 말았다.
엄마 장조림 또 했어? 우린 안 줘도 되는데... 아무도 먹는 사람이 없다니까...
분명 장조림이 맛이 없다는 소리도 아니고, 엄마 음식이 싫다는 소리가 아닌데 말이 그만 그렇게 나와버렸다.
실은 우리 식구들은 장조림을 잘 먹지 않는다는 말을 꽤 여러 번 해왔다. 주더라도 조금만 주라고 그렇게 이르고또 이르고 받아올 때마다 거의 부탁하듯이 말했는데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또 한 뭉터기, 한 뭉터기 덥죽덥죽 싸주는 사람은 바로 엄마다.
내 얘기에 엄마는, 그럼 그냥 둬! 하고 차갑게 말한다.
냅두면 어쩌려고!
그냥 뭐 내가 다 먹든지 버리든지!
그 얘기에 나는 또 한번 욱한다.
엄마 화나라고 한 소리 아니잖아!
안먹는 음식 받아와 금세 상해 버릴 때마다 죄짓는 기분이 들어 늘 마음이 안좋았기에, 조금만 해서 조금만 먹자고 그렇게말하는데도 엄마의 큰손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실은 친정에 갈 때마다 거실 한 바닥 꺼내 주는 차고 넘치는 엄마 음식들이 언제부턴가 달갑지가 않고 숨이 턱턱 막혀오기까지 한다.
요즘 들어 엄마와 대화하는 것도, 엄마가 살림하는 방식도, 엄마가 싸주는 음식도 다 거슬리고 힘에 겹다.
몇 해 전까지도 혼자 두 딸들 악착같이 키워준 엄마가 늘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랬더랬다.근데 왜 갑자기...
자라면서 엄마와 난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엄마는 한량인 아빠와 사느라, 죽도록 싸우고 일하느라 늘 지쳐있고 뽀로통하고화가 나 있었다.엄마의 온 신경은 온통 아빠에게 가 있었다.
첫브라도 내 입으로 쑥스럽게 사달라고 말해야 했고, 첫 생리가 묻는 팬티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내다 버렸다가 아까운 팬티 내다 버렸다고 핀잔만 들었다.
어릴 때부터 방학마다 외가에 보내졌던 나는 그래도 그런 엄마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부터집안 분위기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나는그것이 만성이 되어 우울증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우울감에 쪄들어 살았다. 엄마 역시 늘 그런 얼굴이었기에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줄 알았다.
모처럼 엄마가 이벤트처럼 방학에 시골에 같이 내려와 나랑 개울가라도 함께 걸을 때면나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었는데, 엄마는 조금 걷다 말고 느닷없이 더 걸을 거면 혼자 있다 오라고 하고는 황급히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곤 했다. 어린 나는 실망한 마음으로 개울가에 서서 돌아가는 엄마의 차가운 뒷모습을 울적한 마음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엄마는 늘 그랬다.
엄마의 음식이 마음이랍시고 산더미처럼 엄마의 거실에 쌓여갈 때, 나는 그것들이 들어갈 내 마음의 공간이 없다는 걸 느낀다. 내 마음이 이토록 작은 건 아마도 받은 경험이 없어서겠지...
아이들 키울 때 나는 아이들 우는 소리에 극도로 예민했었다. 전쟁을 치르듯이 아이들을 죽을힘을 다해 키워야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이들이 매달리면 견디기 힘들었다. 나 역시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더 이상 내게 매달리는 나이가 아닌데, 나는 왜 갑자기 엄마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음을 이토록 혼자 서러워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잘 안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무책임한 아빠를 대신해 우리 자매를 최선을 다해 키워왔다는 걸. 그런 엄마에게 모녀간에 마음을 읽고 나누는 행위는 어쩌면 사치였을 것이다. 엄마 역시도 엄마의 엄마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서 줄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엄마는 차가운 게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거다. 엄마는 늘 나를 애틋해했다. 많이 못줘서, 많이 못해줘서 늘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진심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더 화가 난다.
엄마가 준 아무도 손대지 않는 장조림을 버리지 않으려고 오늘도 꾸역꾸역 먹고 있다.
이제 느닷없는 원망은 그만하자 그만하자 되뇌면서. 이것은 어른인 내가 먹는 게 아니라, 어린 내가 엄마의 마음을 먹는 것이다...
어차피 다 지난 일 이제 어쩔 수도 없지 않은가.그냥 그렇다고 믿자.나만 묻어두면 다 그만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