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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보름 Sep 20. 2023

왜 유독 싫어하는 사람과 짝이 될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곧 나의 모습

 학창 시절부터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했던 20대, 아니 그 후에도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왜 하필 나는 저 사람과 짝이 되지?' 하는 의문이다. 학교생활을 할 때에도,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연수를 받거나 어떤 교육을 받을 때에 주어진 과제를 함께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럿의 팀 혹은 누군가와 짝이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내가 선택하는 경우보다 선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좋은 팀을 만나거나 좋은 짝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에는 좋든 안 좋든 내 감정적으로 강한 기억이 우위에 자리 잡기에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은 '왜 내가 하필 저 사람이랑 짝이 됐지?' 라는 것이 많았다. 유독 반에서 내가 안 좋아하는 아이랑 짝이 되거나, 그룹에서 별로 인기가 없거나 어딘가 모르게 나의 맘에 들지 않는 사람과 짝이 될 때면 그런 생각을 꼭 하곤 했다.


 그 후로도 그다지 다른 삶을 살지 않아서인지, 사실 이것은 40대가 된 지금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독 내 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꼭 짝이 되는 이유, 그것은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좋은 면이 있고 안 좋은 면이 있는데 왜 내가 싫어하고 안 좋은 모습의 면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좋은 면은 받아들이되, 자신의 안 좋은 면은 거부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거부하고 저항하는 나의 모습들은 내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자리잡지 못하고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가 내가 바라보는 현실 (나는 나를 볼 수 없기에, 투사효과로) 즉, 내가 보는 다른 사람들, 주위 사람들에 의해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뤼디거 달케의 <마음과 질병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모든 것, 우리가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 우리가 겪고 싶지 않은 모든 것,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이 모여 우리의 의식의 그림자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가능성에서 나머지 반쪽을 거부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사라지게 하지는 못하며, 다만 나라는 정체성 혹은 자각의식에서 쫓아낼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거부'하는 것은 비록 한쪽 극을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놓았지만, 그것의 존재마저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거부당한 극은 이제부터는 우리의 의식성의 그림자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보지 못하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의식하지 못하게 된 모든 거부당한 현실의 영역을 통틀어 '의식의 그림자'(이 개념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부른다.

  


 현실이란 거울은 계속해서 나의 무의식을 비추고 보여준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 거부하고 싶은 나의 모습들을 나의 그림자에 넣어둘수록 그것들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 있다가 현실에서 내가 보고 인지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가 감춰왔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런 모습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우선 그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모습이 내 안의 나의 모습임을, 내가 저항하여 나의 그림자 속에 들어있었던 나의 모습이었음을 인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깨닫고 그 모습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선 그림자를 만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조금씩 나는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짝이 된 현실을 부정하고 싫어하고 거부했다면(그럴수록 그런 모습은 더 강하게 나의 그림자로 자리 잡는다.) 지금은 내 주위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면 '아, 저것은 아직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모습이구나, 내가 인정해줘야 할 나의 모습이구나.' 하고 인지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직도 나에게는 '강한 나,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나, 욕심이 많은 나, 베풀 줄 모르고 내 이득에만 급급한 나'와 같은 모습들이 있다. 이 모습들을 내가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며 지내왔기에 아직도 그런 모습들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나에게 보인다. 아직도 주변사람들을 통해 그런 모습들이 보일 때면 이제 그런모습들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아직도 나에게는 욕심 가득한, 나만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남을 배려한다 하면서 오히려 내 이득만 챙기려 하는 그런 눈앞의 이득에 급급한 모습들을 갖고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나를 둘러싼 자아(에고)를 깨고 내 안의 온전한 나와 만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깨닫고 배워가야 하기에 당연히 이 과정들이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을 안다면 행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을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곁에는 마음씨 좋고 배려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내 곁에는 어떻게든 내 것을 빼앗아가려 하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혹은 내가 싫어하는 모습의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내가 바꾸어야 할 것은 '단 하나'이다. 문제는 나의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싶다면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지를 남의 시선, 보이는 시선이 아닌 내 안에 나의 시선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오로지 나만 아는 내면의 나를 말이다. 나의 이런 면은 좋고 이런 면은 좋지 않고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나의 모든 모습을 하나씩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잘했을 때만 이뻐하고 못했을 때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잘난 부분, 못난 부분 모든 부분을 다 받아들이고 예뻐하고 사랑해 주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내 부모에게 그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 주변을 바꾸고 내 환경을 바꾸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내 자식을 이뻐하고 사랑하듯 나의 못난 모습, 이기심 많은 모습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거부하지 않때만이 그것들이 그림자가 되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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