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ㅜ
ㄹ
물에 대한 얘기를 한 번쯤 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생존이다.
어릴 적 집에는 보리차나 결명자차가 병에 담겨 냉장고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가끔 주말에는 빈 물통을 여러 개 들고 약수터로 향하곤 했다. 약수터는 그렇게 익숙한 곳이었고,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나서도 개발되지 않은, 얕은 뒷산 약수터에 자주 가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생수를 사 먹는 일이 익숙해졌고 사무실의 정수기 물통을 바꾸는 일도 거뜬했다. 확실한 요령이 있어서, 약간 집중하며 그 순간을 즐기기도 하고 무언가 역도는 대단한 스포츠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2021 여름, 부산에서 놀다가 비행기를 타고 간, 고성의 꽃사슴 민박집 바닥에 셋이 나란히 누워 보았던 올림픽 역도 경기가 생각난다. 본가에는 정수기가 설치되었다.
우리집은 가끔은 국이나 찌개 대신에 보리차를 같이 마시고 한 냄비 종종 끓이거나, 기본은 2리터 생수를 필요할 때 한 병씩 사곤 하는데, 마트나 편의점도 인근이어서 불편함을 모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 오거나 필요할 때 1분 거리의 슈퍼나 편의점으로 가곤 했다. 슈퍼가 가격도 저렴해서 팩으로 구입할 이유가 없었고, 작은 집에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아서 좋았다. 문제는 이사하고 나서 생겼다.
이사한 집은 이전에 살던 곳에서 5분 거리인데 그 5분 동안 급경사를 올라가야 하는 곳이어서 한여름에 이사한 우리는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그 길을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꼭 쉬어갈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본 원 주민들의 길 오르는 방식은 아주 천천히 짧은 걸음으로 걷기였고, 그냥 다니지 않고 아이스크림이나 간식을 먹기도 했다. 어떤 어르신은 가족과 통화하며 '난 더 이상 못 올라간다! 여기로 차를 가지고 와라!' 큰소리치시기도 했다. r은 '강가에 살고 싶은데, 왜 산으로 이사를 왔냐'며 본인은 넓은 강변이 좋다고 했다.
몽골의 고비 사막을 오르던 때가 생각난다. 멀찍이서는 모래의 언덕 지점으로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어서 '금방 다녀오지.' 하며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이 모래 언덕이라는 것은 한걸음 발을 앞으로 디디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되는 곳이었고, 이정표가 없는 모래사면은 보통 산을 오르며 생각하는 정상까지의 거리와 시간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없는,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확실히 그 오름을 만만하게 보고 생수 두병 만을 가지고 올라가기 시작한 우리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입술이 바짝 마르고 물 한 모금을 아껴먹게 되었다. 웬만하면 산에서 더 못 올라가겠다고 한 적 없는 내가, r과 j에게 나는 틀렸으니 둘이 정상에 다녀오라고 할 정도였다. 정상이 가까이 보였지만 다가갈 수 없는 무엇 같이 무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면 이 동네에는 편의점이나 슈퍼가 없기 때문에 아랫동네, 그러니까 원래 이용하던 슈퍼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최단경로는 아무래도 그 길이고 왕복하면 10분이다. 평소면 별 것 아니었지만 햇빛과 경사, 거기에 더해 집 정리가 많이 되지 않은 2주 정도 동안, 세탁기와 에어컨 문제, 모든 문틀에 접착제 제거와 페인트칠 등등으로 진이 빠져 더, 왔다 갔다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과거형이다. 더위와 습도가 한풀 꺾이고 바람도 불고, 집수리도 어느 정도 끝나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되었고, 안정된 지금에서야 웃으며 쓸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물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상수도가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 지하수를 발견하지 못하면 집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다.
예전 방식대로, 습관대로 생수를 하나씩 사던 우리는 금방,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대로 보리차를 더 많이 끓여 식혀두기도 했지만 요리할 때 생수가 따로 필요한 경우도 있고 더운 날 보리차 끓이기가 일이 되었으며, 그러니까 더더욱, 왠지 더 맹물을 마시고 싶은 날도 있어서, 그리고 적응이 되지 않아서 아랫마을에 물을 사러 간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했다. 차를 가지고 큰 마트에 가보기도 했지만, 필수로 사는 것들만 사 오면 되는 날들에서는, 대량으로 사게 되는 것과 북적이는 사람들과 동선, 시간과 거리 등의 누적된 피로감이 더 불편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것이 옆집에 배달된 생수팩이었다. ‘우리가 살 길은 마트의 배달 서비스이다!’ 배달음식은 가끔 피자만 시켰고, 물건도 직접 구입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택배 이용할 일도 거의 없는 생활을 한참 하고 있어서 식료품 배달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장을 보고 생수를 한팩 추가해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오니 잠시 후에,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식료품이 배달되었다. 너무나 감사한 날이다. 나의 안정과 우리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렇게 몇 번 물을 공급받았다.
이건 호들갑스러웠던 잠시의 일로 지금은 다리가 튼튼해지고 모든 것이 안정되어서, 슈퍼도 예전처럼 편하게 이용하고 물을 필요할 때 사 오고 있다.
그때 우리의 기운을 빠지게 한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오래 쓴 세탁기가 고장 난 것이다. 이건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일로, 맥이 풀리듯 퓨즈가 나간 상태가 되었다. 급한 대로 하루는 손세탁에 도전하며 물을 받아 여름옷들을 빨았다. 새 물건을 사기보다 당근마켓을 검색하고 세탁기 가져올 방법을 알아보다가 시간을 보내고는 손세탁은 안 되겠다며 옷을 짊어지고 아랫마을의 무인 세탁소로 가서 건조까지 뽀송뽀송하게 마친 옷들을 이고 다시 집으로 오기를 몇 번 하다가, 나는 간편하게 최신형 큰 세탁기를 구입했다. j가 먼저, 세탁기 산 얘기를 써보라고 했지만 그 웃기고 슬픈 얘기는 혼자 꺼내보고 싶다.
우리는 꾀 아날로그 식이고, 보통은 없이 사는 편이어서 작업도구인 노트북, 스마트 기기를 제외하고는 가전제품이 모두 구식이다. 작은 냉장고와 세탁기가 전부, 전자레인지는 장 속에 들어가 있다. 그랬던 집에 커다란 새 세탁기가 들어온 것이다. 설치 기사님은 말씀하셨다. ‘인공지능 기능을 많이 사용들 하십니다.’ 커다랗고 새침한 사막의 장미꽃 같이,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한 우리 집에 세탁기가 이질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낭, 나라 낭~ 세탁이 끝나면 경쾌한 소리를 내는 게 꾀 기분이 좋다. 통 안에서 물줄기가 세탁물에 맞춰 뻣어나간다. 의자 하나를 앞에 두고 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이 똘똘한 세탁기는 내가 필요한 시간에 세탁을 완료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임을 다하며 담겨있는 세탁물이 뭉쳐지지 않도록 통을 돌린다. 스마트한 폰에 깔린 어플의 알람이 울리면, 상태를 확인하고 다음 임무를 준다, 듬직하다.
사실 올해 장만하려고 했던 것은 식기세척기였다. 몇 해 전부터 j가 사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기대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전에 본 틱닛한 스님의 대화 속 식기세척기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며,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마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조금 가지고 있었다, 천천히 물에 흘려버리는 것들. 하지만 AI 세탁기와 며칠을 지내본 나는, 식기 세척기뿐 아니라 로봇청소기를 포함하여, 하나 둘 기기들을 모아 스마트홈을 구성하고자 하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들에게 일을 잔뜩 맡겨 놓고는 산으로 들로, 카페로 놀러 나갈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정수기 구입을 따져 볼 수도 있겠지만, 물을 지고 나르는 일을 계속할 것 같다. 욕실 창문으로 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 나와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