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재료 활용하다 발견한 당근의 맛
당근은 좋아하던 식재료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 의식하지 않던 순간 약간 물컹하고 묘하게 이질감 느껴지는 맛을 거슬려했었다. 잡채나 볶음밥, 탕수육, 김밥 등에 보통 당근이 들어갔는데, 반투명한 오렌지 색이 주는 매력과 당근에 들어있는 눈에 좋다는 비타민,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왕 먹을 거면 아삭한 상태가 더 좋았다. 별다른 관심을 끌만한 무엇이 아니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이런 생각이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텃밭을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재료를 맛보고 다루면서이다. 흙과 비, 바람과 관심은 무엇이던 맛을 특별나게 했다. 상추, 가지, 호박, 무 그리고 당근.
수확한 당근은 생으로 먹어도 맛있었고 당근 주스를 만들기도 했다. 시큼함 없고 느끼함도, 끈적임도 없는 당근 주스였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야채수프나 닭백숙, 고기를 넣어 끓인 포토푸를 만들면 당근에 고기, 향신료가 베어 맛을 만들어냈다. 큼직하게 썰어 오래 익힌 포슬포슬한 당근을 툭 숟가락으로 베어 소금을 몇 알 올려 먹는다. 어떤 맛이 들었는지 살핀다. 무도 마찬가지로 다른 맛을 흡수하지만 당근은 본래의 맛이 강하기에 다른 재미가 있다.
김밥 쌀 때는 재료 준비에 기름이 많이 들어가면 재료들이 어우러지는 담백함이 적어지는 것 같아서, 기름을 적게 쓰려고 마른 팬에 오래 볶다가 올리브 오일을 조금 첨가해 더 볶는데, 약간 달큰하면서 신선한 당근이 부드럽게 씹히면 맛이 더 좋았다.
당근을 얇게 채 썰어, 얇은 튀김옷을 입혀 깨끗한 기름에 튀김 한다. 다른 야채들과 함께 야채 튀김을 하기도 한다. 야채들의 맛이 베인 야채 유가 된, 남은 기름을 볶음밥이나 달걀 프라이할 때 쓰면 좋다. 예전에 야채튀김을 하고 남겨진 기름이 깨끗하고 색도 좋아서 남겨두었다가 볶음밥을 했는데, 단순한 재료들만 넣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맛이 풍부해졌다.
파 기름 만들 듯이 올리브 오일에 당근을 오래 볶아 당근 기름을 낼 수도 있다. 달콤하면서 뭔가 고급스러운 향이 가득 퍼진다. 이게 당근 이야기를 남겨놓으려고 한 이유이다.
김밥하고 남은 당근으로 볶음밥을 하려고 마른 바질을 달궈 올리브 오일과 당근을 듬뿍 넣고 볶았는데, 점점 진하고 달콤한 향이 볶을수록 퍼져 나왔다. 오일을 넉넉하게 쓰고, 삶은 것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오래 볶는다. 굵은소금을 살짝 뿌린다.
그렇게 만든 당근 볶음을 밥 위에 듬뿍 얹어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참치+고추장과 비빔밥으로 먹어도 좋다. 당근 기름도 같이 넣어 섞는다. 간단하면서 근사한 맛의 ‘당근 비빔밥’이 된다.
예전에 몽고에 여행 갔을 때 울란바타르 식당에서 당근 김치를 먹은 적 있었다. 당근과 야채들로 만들어진 샐러드인가 생각했는데 영락없는 김치 맛이었다. 마트에서 병에 담긴 당근 김치도 팔고 있었다.
r은 안과 시력 검사하기 전, 꼭 먹어야 한다며 카페에서 예약시간 기다리는 동안 당근케이크를 먹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귀여운 이름과 고운 색을 가지고 있지만, 당근은 뿌리채소답게 꾀나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재료 같다. 푹푹 삶거나, 오래 볶거나. 신선하게 먹거나. 적당히 하면 그 매력을 살리지 못한다.
당근을 자를 때 알 수 있다. 좋은 당근인지 아닌지. 마트에서 잘 골라온 당근은 어김없이 자를 때 풍기는 향부터 차이가 난다. 그러면 더 기분 좋게 요리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흩어졌던 것들을 이렇게 모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작년에 당근 마켓을 한창 이용할 때, j와 r이 대신 나가서 물건을 잡아다 준 적이 있었다. 처음 나가 보는 것이어서 둘 다 재밌어하며, “우리를 알아볼 수 있게 당근을 들고 가자!” 하더니 진짜 당근을 들고나갔다. 그렇게 당근을 들고 지하철역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오신 분이 그 당근을 알아보지 못해서 조금 아쉬워진 이야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