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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배 글쓰기 79일째] 커피 중독

루틴 강박 부작용 효과

1994년 처음 아르바이트했던 카페는 원두를 수동 밀로 갈아 핸드 드립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핸드드립 27년 차다. 원두 종류만 5가지쯤 되었는데 기본 커피는 미리 내려놓았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손님은 원두가 서로 어떻게 다르냐며 종류별로 주문해놓고, 시간이 오래 걸려 힘들게 내려간 커피를 가운데 쭈욱 세워달라 하는 이들이었든데... 대부분이 그랬다, 비교해 본다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얼마 후 사장님은 전동 밀을 구입했다. 손으로 갈기 정말 힘들다면서... 내 팔뚝이 굵어진 건 분명히 그때 수동 밀로 커피를 하도 갈아대서다.


대학 1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 카페는 대학 4년 내내 나의 아지트였고,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사라지는 못된 사장님 때문에 나는 4학년 때도 걸핏하면 커피를 내리고 팔았다. 심지어 돈도 안 받고! 그래도 그 인연으로 아직도 그 사장님과 연락하고 지낸다.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셔서 그 집에 열흘쯤 머물다 오기도 했다.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내가 외국 여행 가서 친구네 머문다 하면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머무는 것 아니냐 하는데 다 그런 특별한 인연들 덕분이다.) 로마에 갔을 때 사장 언니와 함께 판테온 광장 옆, Tazza D'Oro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아이스크림에 올려 또 한 잔, 두 잔을 마시며 역시 커피는 위대하다며 우리는 계속 커피 중독인 채로 살자 했었다.


로마 3대 커피로 유명한 타자도로(Tazza D'Oro)의 에스프레소 잔은 지금도 매일 아침 쓰고 있다!


커피는 지금도 집에서 직접 핸드드립으로 내려 먹는다. 프랜차이즈 커피는 맛없고, 스페셜 커피 맛있는 곳은 찾아다니기 귀찮다. 작센하우스 밀부터 동팟까지 카페급 장비 정도는 다 갖추고 있다가 요즘은 관리가 어려워 동팟과 모카포트는 포기했다. 집 앞에 직접 로스팅하는 카페가 있는데 원두도 좋고 로스팅도 잘한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기호식품, 자기 입에 잘 맞는 커피 찾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바로 집 앞에 로스팅 카페가 있고 그 커피가 내 입에 맞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 100그램을 사 오면 하루에 한 번 에스프레소 한 잔과 그냥 커피 한 잔 두 잔을 마신다. 일주일에 5-6번 내려 먹기 딱 좋았다. 커피 선물도 많이 받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외출도 거의 안 하고 그러니까 커피가 모자를 때도 있다. 어제 커피가 똑 떨어졌다. 이런 젠장! 게다가 헷갈렸다, 카페가 쉬는 날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긴 했으나 아쉬웠다. 오늘 아침 급한 마감에 108배는커녕 커피도 못 마시고 일을 하다가 점심 즈음 가서 커피를 사 왔다.

작센하우스 밀은 사용한 지 15년이 넘었다! 선물해준 남친은 떠났어도 이건 버릴 수 없다!

요즘 커피와 향이 떨어지면 불안하다. 얼마 전 향이 떨어져 가는데 주문하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마지막 2개가 남고서야 주문을 했다. 배송까지 3-4일이 걸린다고 하니 불안했다. 매일 하나씩은 켜는데 모자라잖아, 하고는. 그러다 다음날 또 2개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너무 좋은 거다. 향 한 자루에 횡재한 기분,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램프, 지니라도 만난 듯. 게다가 3-4일 걸린다던 배송이 당겨져 이틀 만인 그다음 날 향이 도착했을 때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커피와 향이 떨어지면 불안 불편하다!

중독일까? 의존일까? 별거 아닌데, 그까짓 향 없으면 다시 초를 켜도 되고 그도 없으면 안 켜도 그만이지. 커피 떨어지면 사 오면 되고, 그까짓 안 마셔도 사는데... 그런데 왜 커피와 향이 떨어지면 마음이 불안하고 짜증이 날까. 다 마음에 달린 것인데. 108배 하루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급한 마감에 늦잠까지 자 놓고 108배부터 할 수는 없는 거면서...


오늘 오전 108배와 커피도 건너뛰고 불편한 마음으로 글을 써서 넘겼다. 점심때가 되어 겨우 커피를 사 와 내리고, 108배를 하고... (밥까지 먹어서 절하는 중간중간 신물이 올라왔다. 절은 빈 속에 해야 한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여유가 생겼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 필립 로스(Philip Roth)


다른 방법이 없다. 내일부터는 좀 더 일찍 일어나고 마감 전에 미리미리 좀 글을 쓰고 그래서 하루의 시작은 108배와 커피로, 향과 모닝페이지로 그렇게 루틴을 시작하는 수밖에. 마음이 불편하고 몸이 찌뿌둥해서는 일은커녕 하루의 시작도 엉망이니까.


이는 중독일까, 의존일까, 강박일까?

루틴의 효과일까, 부작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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