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 장소
108배를 한다고 소문이 나니 사람들이 묻는다. 정말 효과 있어요? 얼굴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무릎은 괜찮아요? 카톨릭이잖아요? 뭘 보고 절하세요? 등등.
나는 불교 신자로서가 아니라 절운동을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 방에서 한다. 덕분에 침대 옆에 공간을 비우게 되었다. 예전에는 지저분하게 늘어놓았던 것들을 매일 치워야 하니, 어느새 공간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앞과 옆으로 거울이 있다. 앞에는 화장대 거울, 옆에는 전신 거울. 정확하게 말하면 앞에 화장대 거울을 보며 호흡을 하고 옆에 전신 거울을 가끔 보면서 자세를 체크한다. 디스크 환자이므로 척추의 기울기와 균형 등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108배를 하면서 보니 화장대 위에 세계지도가 있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갑자기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서 산 것이다. 내가 간 곳을 모두 색칠해야지 했으나 여전히 깨끗하게 선만 그려진 지도다. 그 위로 시계와 사진 액자, 시계는 무소음 시계라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바꾸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 작품은 내게 사진을 가르쳐준 김진석 작가님의 사진과 예전에 우연한 기회로 선물 받은 임채욱 작가님의 것이다. 세계 지도 위에 있는 것은 임채욱 작가님의 사진이다. 아마도 양수리일 것이다. 사진의 색과 당시 내 손톱의 네일케어 색이 같았다. 지금은 한지에 프린트해서 구긴 입체 산 사진 작업을 하는 분인데 예전에는 이렇게 색이 강렬한 작품들을 많이 작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자세히 보니 한 장의 엽서와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다. 엽서는 페친인 박재호 작가님의 사과. 사과 사진을 찍고 프린트해 여기에 다시 파스텔로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분이다. 언젠가 전시회에 갔다가 받은 엽서를 여기 올려놓았구나. 성모 마리아 그림은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만났던 마리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마리는 길에서 세 번 우연히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마리는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는 내게 합석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도 혼자였으니까 당연히 좋다고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독일에서 온 라디오 작가였고, 그 날 두 번의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동생과 함께 걷다 헤어졌는데 그녀와 저녁을 먹었지만 혼자인 나를 보니 같이 먹고 싶었다고. 어차피 와인이 곁들여진 가벼운 술자리 같은 저녁이었으니까.
다음날, 길을 걷다 물통을 잃어버렸다. 이런 젠장! 지금은 산티아고 가는 길 곳곳에 자판기가 있다는데, 내가 걷던 당시에는 없었다. 물이 없이 걷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보니 물병이 안 보인다. 바로 전에 머물렀던 바르(bar)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마침 저 앞에 키가 큰 순례자가 보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걸음을 빨리 했다. 염치 불고하고 한 모금만 얻어먹자.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 척 봐도 독일인이다. 에잇, 물 얻어 마시기 힘들겠군. 나라에 따라 인종에 따라 차별하고 선입견을 갖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당시에 인종차별을 하도 당해서, 동양의 작은 여자아이에 대해 무시하는 게 특히 심했던 독일인을 별로 안 좋아할 때였다. (나중에 알았다 차별이 아니 차이고 나름의 배려였다는 걸) 그래도 목이 너무 말라서 걸음을 더 빨리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마리였다, 빙고!
마리는 물에 발포비타민을 넣어주면서 많이 마시라고 다 마시라고 해준다. 고맙다. 그렇게 두 번째로 우연히 만난 마리는 그 날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그 마을은 아스토르가(Astorga) 성당이 예쁘고 초콜릿 박물관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우디의 주교궁이 멋있었다. 하루 종일 빛을 구경하고 싶었던 가우디의 건축물이 기억에 남는다. 그 날 저녁 같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다음 날이 마리의 생일이라고 했다. 무언가 주고 싶었다. 잠시만 기다려! 하고는 얼른 초콜릿 박물관으로 뛰어가 초콜릿을 사다 주었다. 마리는 다음 날 같이 알베르게에 묵는다면 그 초콜릿에 생일초를 불자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성당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또 다음 우연을 기대했다. 그러나 다음 날, 나는 많이 걷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알베르게에서 마리가 나의 초콜릿에 생일초를 꽂고 매우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성모 마리아 그림은 그때 마리가 내게 초콜릿의 답례로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수호 마리아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영어가 많이 딸려서 대화가 어려웠다. 그녀는 나보다 4살이 많았고, 독일의 라디오 작가였는데, 한국의 방송작가와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한국의 방송작가가 왜 프리랜서인지, 정규직이 아닌지 이해할 수 없다 했고, 나도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좋은 글을 쓰라고 성모 마리아 님이 도와줄 거라고 말하며 그 그림을 내게 주었다. 자세히 보면 혼타나스라고 쓰여있다. 산티아고 가는 길 어딘가의 마을에서 나누어준 알베르게 명함 같은 것이다. 한동안 그 마리아 그림은 내 지갑이나 다이어리에 꽂혀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 그 위에 올려놓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그것들을 보며 절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새삼 기분이 좋아진다. 세계지도, 색감이 좋은 사진, 마리의 마음이 담긴 성모 마리아 님 그림...
매일 반복해도 이렇게 새로운 깨달음이 있으니 108배가 즐겁다.
참,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알았다. 마리를 우연히 보았던 게 한 번 더 있었다. 길을 매우 천천히 걷는 여자가 있어 봤더니,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것이었다. 무거운 배낭이 힘드니까 치약조차 반으로 잘라버린다는 그 길에서 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우며 걷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그러는 것과 또 다른 일이다. 빈 페트병 따위 누구는 그조차 무겁다고 버렸을 텐데, 그것을 주워 다음 마을까지 가서 쓰레기통에 담는 모습이 예뻐서, 그 마음이 좋아서 찍어두었는데 그게 마리였다!
오늘은 마리를 생각하며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야지!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내가 한 번쯤 언급되었을까?
**방청소도 좀 하고 인테리어도 좀 바꿔볼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