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천천히, 스미는>
유행에 맞춰서 당신의 영혼을 편집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강렬한 집착들을 무자비하게 따라가라.
- 프란츠 카프카
요즘 작가들의 산문을 베껴 쓰고 있다. 참 유난스럽게 싫어했던 짓을 내가 스스로 하고 있다는 게 나도 좀 놀랍기는 하다. 처음 방송작가가 되려고 아카데미에 다닐 때, 방송 글을 잘 쓰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베껴 쓰라고 했다. 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이었다. 성우의 내레이션과 출연자의 현장음, 인터뷰와 화면의 장면 장면까지 그대로 받아 쓰고 베껴 쓰고, 그것을 분석해 뼈대-구성을 정리하고, 다시 재구성한 다음 새롭게 내레이션을 쓰고 보다 적절한 인터뷰로 바꿔 보는 것이다.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고 하다 보면 지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몇 번만 해보면 구조가 파악돼 재미가 확 사라진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나도 후배가 생기고 어떻게 해야 “방송 글쓰기가 늘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같은 방법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 방송작가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백일장에서 상 좀 받았던 소위 글 좀 쓴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방송의 글은 그 이전까지 쓰던 글과 많이 다르다. 화면을 생각하며 써야 하고, 그림과 인터뷰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글도 쓸 수 없다. 글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로 전달된다. 게다가 방송 원고를 쓰는 시간은 언제나 매우 짧다. 피디도 마지막까지 편집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성우의 더빙과 방송시간까지 계산하면 그 중간에 작가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길 수가 없다. 그래서 피디도 작가도 방송을 위해서는 완결하기보다 멈춘다고 생각한다. 마감 시간에 맞춰 최선을 다하고 멈추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최선을 쥐어짜 내기는 한다.
방송과 홍보 등을 오래 하다가 인쇄 쪽 글을 처음 쓰면서 당황스러웠다. 화면이 없으니 자유롭기도 하지만 묘사가 중요하다. 어떻게 보이듯이 쓸 것인가? 그게 참 어렵다. 영상 글을 쓸 때는 “화면에 뻔히 보이는 것 읊어대지 마!”가 철칙이다. 방송 보다가 화면을 읽어주는 내레이션을 들으면, 초짜가 썼구나 바로 알게 된다. 요즘 어떻게 하면 “갑자기”나 “어느 날 문득”이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접속사를 빼고, 묘사를 실감 나게 할 수 있을까에 꽂혀있다. 공유의 “베드 타임 스토리”를 듣다가 귀에 꽂힌 영미 작가들의 산문집 <천천히, 스미는>을 하루에 한 편씩 베껴 쓴다.
오늘은 제임스 에이지의 <녹스빌 : 1915년 여름>이었다. 평화로운 테네시 녹스빌의 여름날 저녁 풍경,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나가 놀고 아버지들은 호스로 잔디밭에 물을 준다. 메뚜기가 울고 기차가 지나가고 그러다 뒤뜰에 퀼트를 깔고 가족이 모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쌍둥이자리답게 제임스는 어린 날의 기억, 따스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풍경을 별로 특별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처럼 재잘거린다. 언뜻 맥락이 없는 듯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순간순간의 기억을 잘 연결했다. 마치 가족이 누워있던 퀼트처럼.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해의 여름날 풍경으로 이는 그의 사후 출간되어 퓰리처상을 수상한 <가족의 탄생>에 프롤로그로 쓰였다고 한다.
좋은 글을 베껴 쓰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고, 구조를 뜯어보는 것이 재미있다. 그토록 싫어하던 베껴쓰기를 스스로 한다. 죽을 때까지 읽고 쓰는 것이 작가의 일이니까, 이번 생은 계속 읽고 쓰고 읽고 쓰고 할 수밖에 없나 보다. 위대한 글을 쓴 사람의 책은 평생 다 읽지 못할 만큼 많으니까.
108배를 처음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절하면 되는 거잖아” 생각은 쉽다. 하지만 이게 단순한 반복동작이다 보니 자세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무릎 관절에 무리가 간다든가 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나는 디스크와 이명에 시달리는 환자니까. 인터넷이나 책에 있는 방법을 문자 그대로 읽고 따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치 아이가 처음 걷는 것처럼 내 몸이 내 마음대로, 활자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9개월 동안 수 만 년에 걸친 인류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겪는다. 그리고 태어나서도 스무 해 정도 자라야 성인으로서 제대로 몸과 마음이 성장한다. 소나 개는 태어나자마자 걷기 시작하는데, 인간은 아장아장 걷기까지도 1년이나 걸린다. 아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관찰하고 따라 하다 마침내 걷는다. 그러나 걷는 모습은 사람의 지문처럼 모두 제각기 다르다.
카프카의 말처럼, 내 영혼이 집착하는 대로 무자비하게 따라가다 보면
108배도 글쓰기도 열심히 따라 하다 보면 나만의 방법, 문체, 스타일이 생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