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유증 + 이명과 불면
잠 못 이루는 밤을 괴로워해 본 사람은 안다.
불면증은 내면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다.
- 헤르만 헤세, 잠 못 이루는 밤
잠 못 이루는 밤을 괴로워해 본 사람은 안다고, 불면증이 내면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헤세의 말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가 진짜 불면증이 심해서 괴로웠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원고를 밤에 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작가와 불면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하지만... 너무 괴롭다. 그리고 이제 하루를 밤새워 일하면 그 후유증이 3-4일은 간다. 20대까지는 밤새워 일하고 또 놀 수 있었고, 30대까지도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았다. 그러나 40대가 되니 도저히 안 되겠다.
피곤이 극에 달하면, 특히 원고를 쓰느라 활성화된 뇌가 원고를 마감하고서도 바로 멈추지 못하는 날이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그렇다고 더 할 일도 없고(있어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누군가 불러내 놀기도 어렵고(프리랜서 재택근무자의 비애) 무엇보다 피곤이 쌓여 잠 아니고서는 풀 것이 없다. 그러니 자야 하는데 못 자는 괴로움은 상상 그 이상이다.
불면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통사고 이후, 이명이 생긴 이후의 불면증은 또 다른 차원이다.
조용한 방에 앉아 딸깍이는 키보드 소리를 배경음 삼아 열심히 원고를 달리다 문득 이명이 들려온다. 벌써부터 걱정이 시작된다. 오늘 밤 잠을 못 자면 어떻게 하지. 내 경우 이명은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는 혈류성 이명이라 진단받았다. 피가 흐르는 것은 심장이 뛰고 폐가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인데, 그게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의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면증과 비슷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잠을 자고, 잠을 자야 계속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데, 그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는, 잠을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다는 잠에 대한 의식이 나를 지배하면서부터 불면증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10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개월 이상 작업한 다큐가 다음 달에 편성이 잡혔다. 종편을 마치고 다음 주에 더빙인데, 내레이션을 성우가 아닌 배우가 하기로 했다.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 내 인생의 한국영화 1부>란 제목 그대로 한국 영화 100년 기념 다큐이기 때문에 영화배우가 내레이션을 하는데, 배우가 내레이션을 하면 인지도와 연기, 친근함이라는 장점이 있는 대신 원고를 빨리 넘겨줘야 하고, 신경 쓸 일도 많다.
한국영화 100년 다큐는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사업부에서 추진한 것인데 어쩌다 보니 한국영화 100년인 2019년을 지나 2020년인 올해 방송을 하게 되었다. 100년의 쾌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2월의 열기도 가시고, 2019년 한 해 극장 관객 2억 2천만 명으로 역대 최고의 기록이 무색하게 코로나 19 사태로 극장도 영화 촬영 현장도 올-스톱되다시피 한 이 시점에 방송이 되는 게 무척 아쉽지만, 그래도 방송은 나가야 한다.
(잠깐 중간 광고)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 내 인생의 한국 영화 1부
ebs, 2020년 5월 11일 월요일 저녁 22:40~23:30
1919년 단성사에서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한 지 100년
우리 가슴속에 반짝이는 보석 같은 영화들
쉼 없이 달려온 한국 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1부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룬다.
한국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님, 1970년대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해 한국 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이장호 감독님,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던 한국의 스필버그 배창호 감독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만든 90년대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님부터 한국영화 100년의 선물이자, 세계 영화사를 새로 쓴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할리우드 진출로 세계적 배우가 된 이병헌, 칸의 여왕 전도연, 아역 출연만 70편, 영원한 현역배우로 한국영화사를 관통한 안성기 선생님까지 스무 명의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을 인터뷰했다.
내레이션은 <기생충>의 스타 배우 조여정이다!
며칠에 걸쳐 원고를 썼다. 영화 <기생충>을 다시 보고 배우 조여정을 스토킹 하듯 영화와 인터뷰 등을 훑었다. 그렇게 원고를 써서 넘기고 수정까지 마친 게 어제저녁 8시. 대기 좀 하다가 10시도 안 되어 잤다. 그런데 1시간도 안 되어 깨서는 밤새 헤맸다.
오후 늦게부터 이명이 왱왱거리는 것이 걱정은 되었다. 음악이나 ASMR을 켜 두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래저래 이명과 싸우며 그래도 원고는 넘기고, 10시도 안 되어 졸린 것이 반가워 책 필사하던 것을 집어치우고 바로 자러 갔다. 침대에 누우니 이명이 또 들려서 공유의 베드타임 스토리를 켜고 얼마 안 되어 깜빡 잠들었다. 그러다 눈을 떴는데 왠지 불안했다. 시계를 보니 1시간 남짓.... 지나 있다. 이런 젠장!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수면제를 먹자니 저녁을 먹을 때 반주를 했던 것이 걸린다. 그렇다고 다시 술을 마시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니 우유라도 한 잔 따끈하게 데워 마실까?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면 정말 다시 못 잘 것 같다. 무엇보다 너무 피곤해 눈이 잘 떠지지도 않는다. 다시 잘 수 있어! 비장하게 몸을 돌려 누웠는데 말똥말똥...
불면의 밤, 시간은 길게 늘어났다가 강렬하게 압축되었다 제멋대로다. 스마트폰을 켰다가 <나 혼자 산다> 송승헌을 본다. 제주도, 푸른 바다에 드론 샷이 화보다. 아니야 자야 해. 폰을 끄고 돌아누웠는데 다시 뇌가 돌기 시작한다. “은, 는, 이, 가, 만, 도”가 파도를 치며 뒤바뀌고 “-요”와 “-죠”, “-습니다”가 요동친다. 원고를 쓰며 고민했던 문장들이 스스로 수정을 시작했다. 망했다!
일어나 앉아 머리맡의 책을 펼친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눕는다. 누우면 눈이 감기고 일어나면 눈이 떠지던 인형이 고장이라도 난 듯, 누우면 반대로 눈이 말똥말똥하고 일어나면 눈이 반 넘어 감긴다. 페이스북에 “새벽 2시에 말똥말똥하면 뭘 해야 하나요?” 묻고는 결국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신다. 서서 방을 맴돌며 걷는다. 나는 피곤하다, 피곤하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다시 누워 미 해군의 3분 만에 잠드는 법을 따라 한다. 머리부터 눈, 코, 입... 힘을 뺀다. 아, 또 이를 악물고 있구나. 힘이 잘 빠지지 않는다. 겨우 힘을 빼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해먹에 누워 한들한들, 아차 난 해먹이 무섭지. 잔한 계곡 물 위에 둥실 띄워 잠자던 에어매트로 바꾼다. 물살에 살짝 흔들거리는 것이 아기 요람처럼 포근했던 기억.... 실패!
일어나 서재로 온다. 필사하던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넷플릭스를 켜고 킹덤을 볼까 하다 좀비가 걱정되어 봤던 드라마를 또 본다. 이태원 클라쓰, 도대체 몇 번째니? 생크림 롤케이 크도 한 조각 먹는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잠재우지 않고서는 못 잘 것 같아서. 한 편도 안 되어 졸리기 시작한다. 그래 다시 자자.
컴퓨터를 켜고 침대방으로 가는 사이 또 잠이 깨버렸다. 결국 읽다 만 책을 집어 든다.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와 사뭇 다른 내용도 문장도 왜 이렇게 재미있는데... 결국 다음 달 책 모임 책을 다 읽고 덮는다. 책을 덮고 보니 심술궂은 빨강과 뚱뚱한 여인이 교대로 날 찾아와 괴롭히는 느낌이다. 당장 달려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티파니 매장 같은 곳이 내게는 없다!
새벽 6시 다 되어 겨우 잠들었다가 8시쯤 해외 사는 친구가 별자리 상담을 하고 싶다고 카톡 카톡 깨운다. 자야 한다고 겨우 답장만 하고는 다시 잠들었다. 11시 안 되어 전화가 온다. 엄마다. 아버지 점심 차려 드리란다. 휴.... 이번엔 잠이 달아났다. 108배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차려 드리고 지금까지 하루 종일 비몽사몽 이제야 겨우 모닝페이지를 쓰고, <천천히 스미는> 필사를 하고, 브런치를 쓴다. 이렇게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간다. 그래도 되었다. 올해는 108배와 모닝페이지만 해도 하루를 잘 살았다, 충실하게 살았다.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어제는 마감도 넘기고, 108배에 모닝페이지까지 꽉 차게 보람찬 드문 하루였으니까.
“정말로 좋은 슐루펜(이디시어로 잠이라는 뜻)”(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오늘은 나를 찾아올 것인가?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작가, 트루먼 커포티는 1924년 9월 30일 오후 3시,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태양별자리는 천칭자리, 달별자리는 전갈자리다.
“내 잣대는 누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예요.”
- 티파니에서 아침을, 홀리
관계지향의 천칭자리답다. 내면의 전갈자리가 꿈틀거려 까만색 선글라스를 끼고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화려한 거짓말로 감추고 살면서, 부자와 결혼해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꾼다. 그녀는 결국 그 꿈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목조 인형이 그녀라면.
“나 너무 두려워요, 친구. 그래. 드디어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으니까. 내던져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 티파니에서 아침을, 홀리
어쨌든 스무 살의 그녀는 생각이 많고 자기가 바라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고 완벽해, 그것을 기다리고 찾느라 우물쭈물 결정적 순간에도 결정을 못한다. 관계지향의 천칭이 결혼에 대해 촉각을 세우면서도 어장관리하다 좋은 사람들을 놓치고 결국 혼자 외로운 이유다. 그들에게 잠은 매우 중요하다. 요것조것 생각하다 피곤하면 결정을 유예하고 잠으로 도망쳐야 하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난 잠에 민감한 천칭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