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 23일) 작가는 본능이다

마감 플렉스

"하이힐 신고 마스카라 올리지 않으면 글이 안 써져요!”


마감날에도 하이힐을 신고 풀메이크업한 채 밤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별종 취급했다. 생방송을 많이 했기 때문에 원고 쓰는 날이면 밤을 새고 바로 이어서 방송에 들어갔다. 엠씨와 출연자들 맞이해야 하는데 쌩얼에 후줄근한 차림이 싫었다. 그때부터도 나에겐 마감 플렉스가 본능이었을까?


최근 플렉스가 유행이다. 플렉스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사전적으로는 ‘구부리다’, ‘몸을 풀다’라는 뜻이지만, 1990년대 미국 힙합 문화에서 래퍼들이 부나 귀중품을 뽐내는 모습에서 유래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다, 뽐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마감인데 늦잠을 잤다. 광주 518을 소재로 한 1인 창작 판소리극 <방탄철가방>도 볼 겸, 광주 호텔에서 원고를 마감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광주에 코로나 확진자가 늘면서 공연예정이었던 광주문화예술회관이 폐쇄되었다. 그냥 집에서 원고를 쓰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108배를 하려고 보니 방이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며칠 밖으로 나가 돌아다닌 때문이다. 청소를 하다 보니 끝이 없다.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안 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못된 버릇도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사실 충무로는 또 영화사도 있지만 아스토리아는 누가 시나리오 쓰고, 여관들이 다 시나리오 쓰는 데...”

- 이명세 감독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1부 “나의 사랑 나의 영화” 중에서


마감이 급해지면 노트북과 자료를 챙겨서 카페로 간다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예전부터 펜션이나 호텔을 선호한다. 집에 서재도 있으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집에는 가족들이 있고 청소할 것들과 하려다 미룬 것들이 자꾸만 보여서 원고에 집중하기 어렵다. 이번에는 계획이 틀어지면서 더 그랬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집중하는 게 좋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니까 방 안에 온갖 것을 다 갖춰두고 자가격리에 들어간다고 할까?

21층 디럭스룸 뷰도 좋고 책상에 스탠드가 있어 좋다. 냉장고에는 나의 미니바를 채웠다!

결국 서울 시내 호텔을 예약하고 와버렸다. 마침 서울 여행바우처까지 있으니 그냥 플렉스해버렸다. 5성급 호텔 스위트룸까지는 아니지만 4성급 호텔 디럭스룸 2박에 조식까지 확 질렀다. 체크인하자마자 짐을 풀어놓고 바로 건너편 편의점에 가서 구호물품도 잔뜩 챙겨왔다.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호텔 21층에 앉아 글을 쓰고 있으려니 좋다. 다음에는 원고료 확 올려서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마감해야지. 이제 글 쓰자. 그런데 요가매트를 안 챙겨왔다. 내일 아침 108배는 바닥에 이불 깔고 해야 하나?


108배 시즌 1 23일 차 _ 2020년 2월 4일

https://brunch.co.kr/@bluetwilight/6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8배 22일) 때로 멍~한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