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미나리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굽이굽이 212.3 km를 흘러 전라남도 광양과 경상남도 하동을 가르고 남해로 흘러간다. 섬진강은 지리산과 백운산 높은 산을 휘감고 흐르는 덕분에 4대강의 삽질을 피했다. 모래톱이 살아있고 녹조라떼 대신 갈대숲과 강변 나무가 살아있어 생태계가 보전되었다. 참말로 다행이다.
4월 5일은 하늘이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왕에게 바치며, 왕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겨우내 언 땅이 녹고 한 해 농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때기도 하다. 이때 섬진강에 버드나무가 연둣빛 옷을 갈아입고 하늘하늘 춤을 추기 시작하면 사람들도 모여든다. 광양에는 매화가 하동에는 벚꽃 축제가 열리니 봄과 꽃을 즐기려는 상춘객들이 섬진강을 찾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높아져 개화시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동백, 매화, 목련, 살구꽃, 앵두꽃, 벚꽃, 수선화, 개나리, 진달래 등 봄꽃이 순서도 잊고 제멋대로 피어난다. 올해는 꽃샘추위로 4월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으나 그래도 꽃은 핀다. 야리야리한 꽃잎이 세찬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봄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봄꽃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서울에도 양지바른 곳에는 목련과 매화와 벚꽃이 피고 진달래와 개나리까지 장관이다.
섬진강에서 봄을 만나다
때 이른 꽃을 만나러 섬진강에 간다. 청명에 즈음하여 봄꽃놀이를 가는 것은 하동의 쌍계사 십리벚꽃길과 진해 군항제가 쌍벽을 이룬다. 그러나 몇 년 다니다 보니 축제장은 사람이 너무 많이 들끓어 꽃구경을 온 것인지 사람 구경을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광양으로 눈을 돌렸다. 몇 년 전 하동 가는 길에 광양을 거쳐 들어갔는데 광양에도 벚꽃터널이 장관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하동에서 서울로 올 때는 구례에서 섬진강의 벚꽃엔딩을 제대로 즐겼던 기억도 있다. 광양은 매화, 하동은 벚꽃이라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정한 것이지 않은가. 빛 좋은 광양이 하동보다 벚꽃도 더 좋더라.
구례를 거쳐 광양, 하동까지 섬진강을 넘나들며 동백과 산수유, 매화, 앵두, 벚꽃, 수선화 등 봄꽃을 마음껏 즐겼다. 이제 맛있는 안주에 술을 즐길 차례다. 청명에는 무엇이 좋을까? 어마어마하게 큰 강굴이 벚꽃 필 즈음 제철을 맞아 벚굴이라는 이름과 함께 몇 년 전부터 인기다. 강굴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섬진강 하구 강바닥에서 채취한다. 3-4년 자란 것이 어른 손바닥보다 크다. 껍질을 까고 속살만 해도 앞접시에 한 가득이다. 바다 굴에 비해 짠맛과 비린 맛이 덜하고 싱싱하다. 가격은 좀 비싸다. 귀하고 크기까지 크니 비쌀 수밖에 없다.
벚굴은 L과 처음 먹었다. 방송에서 벚굴을 본 L은 내게 벚굴 맛을 집요하게 묻더니 결국 벚굴 먹으러 하동에 가자고 했다. 미식가 L이 그때까지 벚굴을 맛보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을 정도다. 그러나 나도 L도 처음 먹어보는 신기함에 강굴을 바다 굴과 비교하며 그 신묘한 맛의 진수를 느껴보고자 노력했으나 허탈했다. 짭조름한 바다의 향이 빠진 강굴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동에도 광양에도 벚굴 집이 지천이고 축제장에도 모든 집이 벚굴을 한다.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다. 당최 입맛에 당기지가 않는다.
햇볕 좋은 광양
여행은 맛있는 음식이 진짜다! 그래서 내가 하동보다 광양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과 하동, 전라도와 경상도가 갈라진다. 화개장터는 아랫마을 하동, 윗마을 구례, 광양과 산청까지 전라도와 경상도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래서 벚꽃놀이도 하동의 화개장터가 유명하다. 사실 광양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제철소밖에 없었다. 나도 제철소에 일하러 갔던 기억뿐이다.
어두운 안개 자욱한 옛 싸움터에
지금 요순(堯舜) 시절 맞아 한낮이로세.
- 최수(崔修)
광양은 백운산과 섬진강, 바다를 면하고 있다. 시 전체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산과 강, 바다의 혜택이 풍부한 광양은 왜구에 고통받은 땅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광양현감 어영담은 이순신이 가장 믿었던 장수였다고 한다. 정오의 햇살처럼 따스한 볕이 잘 드는 양지의 땅, 광양은 맛집을 따로 찾을 필요 없는 전라도다. 남들이 하동에 가서 벚꽃을 즐기고 벚굴을 먹는다고 나도 따라할 필요는 없다.
남들과 다르게, 산나물전과 미나리 꼬막무침
내가 빠진 전라도 봄의 맛은 산나물전이다. 나물을 좋아해 설날이나 추석보다 대보름을 더 좋아하는 나다. 향긋한 산나물에 밀가루 살짝 풀어 기름에 지지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산나물전은 김치전이나 해물파전에 댈 것이 아니다. 지리산과 백운산 모두 1,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니 그 산이 품어 키운 산나물은 냄새가 진하다. 취나물, 참나물, 미나리와 들어도 맨날 까먹는 이름 모르는 산나물들이 뒤섞여서도 제각각 맛과 향, 씹는 재미를 다양하게 준다. 언제부턴가 술을 마실 때면 밥이 부담스러워져서 전이나 두부로 대신한다. 밀가루보다 나물이 더 많아 짙은 녹색이 선명한 산나물전이 뜨끈하니 좋다. 제철 맞아 실하게 살이 오른 바지락은 간간이 씹혀 입맛을 더한다. 술도 꼴깍꼴깍 잘 넘어간다. 끝물인 꼬막도 아삭아삭한 미나리와 함께 무치니 새콤달콤매콤 별미다.
산나물전을 먹다가 잠시 L이 떠올랐다. L도 분명히 벚굴보다 산나물전을 좋아했을 것이고, 맛있다, 맛있다 추임새를 넣어주었을 것이고, 사진 잘 찍으라고 전을 집어 주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의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전처럼 뜨끈하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은 나오자마자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서 먹어야 한다고. 사진을 찍다 보면 식어버려 정작 음식은 맛있게 먹지 못한다고. 그러나 L은 언제나 내가 사진을 찍을 때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저렇게 찍어보라고 세팅도 도와주고, 국자로 젓가락으로 음식을 좀 집어 주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하동에 가서 벚굴을 먹지 무슨 산나물전에 철지난 꼬막이냐고 타박이다. 벚꽃에 벚굴보다 광양에서 온갖 꽃을 즐기고 산나물전에 미나리 들어간 꼬막무침과 미나리 듬뿍 매운탕을 먹자 해도 L은 좋아했을 것이다.
에잇! 지나간 옛사랑을 떠올려 무엇하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봄꽃이 더 애틋하듯이 옛사랑도 지나갔기에 그리울 뿐이다. 우리 엄마는 여행이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예쁜 추억 주머니를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다 나중에 꺼내보는 것이라 말한다. 엄마 말처럼 옛사랑도 마음속에 저장된 추억으로 생각하자. 생각나면 생각하고 그리우면 그리워하고 그렇게 쓴 소주를 달게 만들어주는 안주로 생각하자.
봄이 점점 짧아진다. 꽃을 쫓는 마음이 급해져 동동거리다 보면 제대로 꽃을 감상하지 못한다. 눈앞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고, 봄을 봄답게 꽃을 꽃답게 즐기기 위하여 지금을 즐기자!
오늘은 미나리 듬뿍 매운탕에 술을 마셔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