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와 역설이 주는 삶의 재미
"에크 딘 삽 코 자나 헤" (언젠가 우리는 떠날 것이다)
-인도 힌디어 속담
원고 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아무리 미팅과 회의, 섭외 등 자잘한 일이 많아도 작가는 원고로 말해야 하니 원고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원고를 쓰는 데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워밍업 하는 시간도 꽤 걸리고 마침내 구상이 끝난 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시간은 언제나 예상보다 더 많이 든다. 언제나 시간과의 싸움이다.
책 원고 교정을 위해 시내 호텔을 잡았으나 108배 유튜브 종편과 병원 진료, 방송 섭외와 제작진 미팅 등이 앞, 뒤, 중간 촘촘히 채워져 결국 마감을 못했다. 채근하는 일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 자꾸 밀리는 게 싫어 마감 플렉스를 감행한 건데...
내 집 내 서재에서 일하는 게 좋지만 불편한 몇 가지가 있다. 담배와 방청소, 옷. 스무 살에 피기 시작한 담배를 여전히 피운다. 건강 걱정하는 부모님께는 작가 일 그만두면 끊겠다고 돌려 말하면서. 마감이 급하면서 꼭 방청소나 정리 정돈할 게 눈에 걸리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때로 마릴린 몬로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108배 하고, 글 쓰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난 이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산다. 요즘 작업실을 하나 얻고 싶은 이유고 가끔 호텔에 가서 마감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
오늘 체크아웃하기 직전까지 원고 교정 작업을 했다. 연장을 고려할 정도로 작업이 잘 됐으나 오늘도 미팅이두 개나 있다. 호텔에서 나와 미팅 시간을 좀 당기려고 감독에게 전화했는데, 안된단다. 덕분에 사진전을 보고 왔다.
어제 병원에 갔다 오는 길, 반포대교를 건너면서부터 남산을 돌아내려 오기까지 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사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오히려 텅 빈 충무로 골목길을 빙빙 돌아오다 갤러리 브레송을 지나면서 전시회를 기억해냈다. “The Last Dreamer” 페이스북에서 눈여겨보던 <미국, 미국인>이라는 작품이 전시된다고 했었다. 체크아웃하고. 미팅까지 남는 여유 시간에 전시장을 찾았다. 갤러리엔 나 혼자였다. 코로나가 진정과 확산을 반복하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쳐가는 요즘, 이 호사는 특별한 선물이다. 역시 사진은 갤러리에서 보는 게 좋다.
갤러리를 나와 미팅을 오는데 차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정시 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감독이 30분 늦는단다. 미팅 후 또 미팅이 있어 살짝 화가 나려 했는데 단체톡방에 올라온 글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언젠가 우리는 떠날 것이다. 이 세상 여행에 잠시 동행하는 이에게 화내고 불평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갑자기 또 30분의 여유가 생겨 이렇게 108배 기록도 남길 수 있다.
가장 화려한 스타이자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는 평생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백치미의 전형이란 이미지와 달리 지적인 매력이 넘치는 인터뷰가 많다. 세상만사 아이러니와 역설이 넘치고 그것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요즘 잠깐의 시간이라도 내서 사진전을 보고 친구를 만날 수 있어 좋다. 바쁜 중에 여유가 더 달콤하기도 하다. 마감 플렉스로 호텔에서 작업하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작업실은 필요하고, 미팅시간에서 30분에 10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감독은 좀 밉다!
108배 시즌1 64일 차 _ 2020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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