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to 6가 아닌 프리랜서의 마감병
“운명에 우연이란 없다. 어떤 운명에 부딪치기 전에 인간이 그것을 만든다.”
- 우드로 윌슨, 미국 28대 대통령
지난 진료 때 의사에게 물었다.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밤을 새야 하는 일이라 고민이라고. 의사는 간호사들을 예로 들며 주야가 자주 바뀌고 정기적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불면에 좋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이 잠을 잘 자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왜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가? 수면제 처방 때문인가?
그때 아침방송을 고민하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가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고,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 3가지가 모두 불발됐었다. 프리랜서는 언제나 새로운 일거리를 고민해야 하고 일을 하면서도 다음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며, 일이 없으면 없어서 많으면 많아서 고민이다. 인생의 파도는 피하든가 피할 수 없다면 정면승부다.
마침 아침 생방송 메인작가 제안이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확실하지는 않지만...”이란 단서가 붙었지만. 불면으로 고생하는 입장에서 매주 생방 하루 전날은 밤을 새야 하는 아침 생방송 메인작가 자리가 탐탁지는 않았다. 어차피 비정규직도 못되지만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정규방송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10월부터 일을 시작한다고 공언했다. 사람들은 아침방송이 확정됐느냐 했지만 아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나의 예감은 한치도 벗어나지 않아서 9월 말 추석 연휴 전날부터 일이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 6건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돌리고 있다. 그중 하나는 방송 레귤러 프로그램이라 약 4개월 정도 지속이고 하나는 비정규지만 내년 내내 일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나머지는 모두 단발이니 안 할 수도 없고 안 할 이유도 없다 생각했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잠을 줄여 가며 시간을 투자하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도 지쳐 쓰러질 수 있어요. 일단 일이 생기면 좋다고 무작정 다 받지는 마세요!” 며칠 전 뽑은 타로카드가 딱 지금 내 상황이다.
운명에 우연이 있겠는가? 다 나의 선택과 성격 무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외부 일 = 돈 버는 일이 아무리 많고 좋아도 최우선은 나의 첫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고 현실은 당장 급하다고 채근하는 마감이 걸린 일이 우선이다. 결국 나의 첫 책이 무한정 미뤄지고 있다. 며칠 전 편집장에게 전화해 역으로 부탁했다. 내게 마감을 달라. 정확한 시한이 없이 그냥 미루면 올해도 못 내지 않겠느냐, 다른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마감이 급한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 이번 주까지 교정고를 넘길 테니 다음 교정고부터는 마감 시한을 정해달라! 참 어이없는 작가일 것이다. 출판사는 올 가을 겨울 6권의 책을 낸다고 바쁘다. 좋은 출판사를 잡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작가들 신경 쓰느라 나한테는 차례가 안 오나 싶기도 하다. (대표님 보고 계시죠?)
어쨌든 내뱉은 말이 있으니 그리고 이번 주에는 무조건 끝내지 않으면 안 되니 마감 플렉스를 위해 서울 시내 호텔을 잡았다. 그래 놓고 호텔 들어오기 전에 여의도에서 108배 유튜브 종편을 했고,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하며, 내일은 호텔에서 바로 미팅을 가야 한다. 다음 달에 첫 녹화하고 론칭할 방송... 섭외가 하나도 안 되어 있다.
일이 많아지니 더 잠을 못 자 안달이다. 너무 피곤하고 자고 싶은데, 침대에 누워서 멍~ 때리는 날도 있고 그래서 더 힘들지만 어제는 원고 교정을 보다가 잠들었다.
얼마 전 방송 때문에 사전 미팅을 위해 만난 게스트가 그랬다. “소송 때 또 한 번 다치잖아요.” “그냥 내가 벌자.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니 사고는 억울하지만 그냥 내가 벌자 생각해요.” 그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가 극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걷게 된 전직 모델로 한때 아시아 탑이었다. 그도 교통사고 후 걷게 된 것만도 기적이라 하지만 이명과 불면, 두통 등 어마어마한 후유증에 시달린단다.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이제 사고가 오래되었다고 괜찮지 않냐고 말하지만 아니라고. 그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나만 유난 떨고 예민하게 그런 게 아니잖아!
아침에 일어나 호텔 이불을 바닥에 깔고 베개를 무릎 위치에 놓고 108배를 했다. 데자뷔가 아니고 지난봄 마감 플렉스 때가 떠오른다. 그때 앞으로는 원고료 확 올려 호텔 스위트룸 잡겠다 다짐했는데 나의 첫 책 원고 계약금으로는 하룻밤 방값도 안 된다. 그래도 언젠가 내 생각대로 되는 그날을 꿈꾼다. 인세로 폼나게 스위트룸에서 럭셔리하게 쉬자! 마감병 도져서 호텔에 오지 말고 놀러 오자!
*도대체 언제 책이 나오느냐고 피노키오 작가에게 묻는 이들에게 이달에는 나와요, 늦어도 11월엔 나올 거예요, 했었는데. 또 코가 길어졌다. 나의 첫 책은 12월에나 나올 수 있다.
108배 시즌1 63일 차 _ 2020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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