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강박
"아저씨 (아이스크림에 숟가락으로 경계를 그리며) 여기 선을 이렇게 딱 그으면서부터가
전쟁의 시작이에요 으 지겨워"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 1998년) 다림의 말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크게 푸하하 웃었던 장면은 아이스크림 씬이다. 아이스크림에 선을 그으며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 4남매인 내게 정말 실감 나고 공감이 되는 장면이었다.
나는 위로 언니 둘, 남동생이 하나 4남매 중 셋째 딸이다. 그때 그 시절 가난한 집의 4남매는 먹을 것 앞에서 항상 전투태세였다. 그게 싫어서 과자 종합 선물세트에서도 딱 하나 초콜릿만 노리던 나도 라면 앞에서는 약했다. 하루 저녁에 라면을 4번이나 끓였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은 작은언니는 아직도 그 날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이제 과자가 몇 달씩 굴러다닐 때가 많지만 라면은 여전히 예외였다. 한밤중에 영화나 드라마, 혹은 라면 광고라도 보게 되면 라면을 끓였었다. 특히 남이 먹으면 먹고 싶어 지는 게 라면이니가. 분명히 끓이면서 먹을 거냐고 물으면 먹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막상 라면을 끓이면 “한 젓가락만”하고 다가서게 되고, 한 젓가락에서 끝나지 못하는 게 라면이다.
나는 요즘 라면을 잘 먹지 않는다. 거의 중독 수준이었던 라면을 마지막으로 끓여 먹은 게 광주사태를 소재로 한 1인 판소리극 <방탄 철가방>에서 받아온 컵 짜장라면 11월 29일, 밤새 참다가 아침에 끓여먹은 짜장라면이 10월 8일이었다.
집에 라면을 쌓아놓지 않은 지 거의 1년째다. 어제 마트에 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라면을 샀다. 겨울이니까 코로나 때문에 집콕이 길어질 텐데 삼시 세끼 집밥 하기 힘드니까 하면서 샀는데... 밤새워 일하고 아침에 잠들어 코로나 때문에 녹화를 계속할 수 있는가 묻는 MC 매니지먼트 대표의 전화에 깨서는 갑자기 라면이 당겼다. 물을 올리려다가 그래도 라면을 먹으려면 108배부터 하자 생각이 들었다. 108배를 하다 보니 라면보다는 그냥 밥을 먹자 생각이 바뀌었다.
어제는 아침에 우유에 청국장 가루를 타서 먹고, 오후에는 석화와 굴전을 먹었을 뿐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에 우유와 빵을 드시던 부모님이 요즘은 청국장 가루를 우유에 타고 프로폴리스와 꿀을 넣어 사과와 함께 드신다. 나도 덩달아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생각보다 든든하고 간편해서 좋다. 눈뜨면 밥부터 먹을까 씻고 먹을까 고민하던 나였는데, 밥을 세끼 다 챙겨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졌다. 나이가 들어 세끼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집콕하느라 활동량도 떨어져 더 그렇다.
108배를 하고 라면 대신 육개장을 먹었다. 다이어트 강박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입맛이 바뀌고 생활이 바뀐 탓이다.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조미료 듬뿍 들어간 외식이 입에 맞지 않게 되었다. 입맛이 건강해졌다 생각하자. 먹는 즐거움은 다양하고 신선한 제철 음식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커피는 끊지 못하겠다.
담낭 절제술을 받고 의사가 커피부터 끊으라 했는데
아직도 하루 한두 잔은 꼭 마신다.
하긴 술과 담배도 끊지 못하는 나니까.
108배 시즌1 79일 차 _ 2020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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