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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 김금숙 만화

만화책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본 만화책이 김동화의 <아카시아>였나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었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니가 둘 있는데 언니들만 몰래 보던 만화책을 드디어 나에게도 빌려주며 “엄마에게 들키지 마” 했었다. 하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들켰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모르는데, 만화책은 더 심했다. 엄마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 뭘 하는가 와봤다가 만화책에 푹 빠진 셋째 딸을 본 것이다. 반전은 엄마였다. “엄마도 스무 살 때 처음 서울 올라와서 맨날 만화책 쌓아놓고 읽었어. 만화책이 어때서?” 그 후로 만화책을 맘대로 봤다.


방송일을 처음 시작하고서도 만화책을 많이 읽었다. 음식 프로그램을 많이 했는데 맛있는 음식을 놓고 맨날 맛있다만 할 수는 없으니까, 다양한 표현을 위해 만화책을 찾아 읽었다. 후배들에게도 권했다. 만화를 보는 것만으로 편집의 흐름에 대한 연습이 되기도 한다. 풀샷과 클로즈업, 원샷과 떼샷의 미묘한 변화는 흑백의 화면이 눈에 편하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배치해야 하니 그대로 편집 교과서다.


김금숙의 만화 <풀>이 한국 그래픽 노블 사상 최초로 미국 만화계의 대표적인 상인 하비상(Harvey Awards) 최우수 국제 도서(Best International Book) 부문을 수상했다는 뉴스를 들은 게 10월 초였다. 그때 사놓은 책을 여태 쌓아두었다가 새해를 맞이하며 읽었다.


JTBC  특집 다큐멘터리 <백 투더 북스> 2편 "셰익스피어 인 파리" 방송 캡처 - 비올렛 앤 코 서점과 진열장의 김금숙 <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2019년 JTBC 다큐멘터리 <백 투 더 북스> 2부 “셰익스피어 인 파리”를 작업할 때였다. 파리의 LGBT서점 “비올렛 앤 코”의 진열장에 한국 만화 <풀>이 있었다. 비올렛 앤 코라는 서점 이름은 1940년대 사생아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 낙태, 동성애까지, 여성의 삶과 에로티시즘을 거침없이 표현한 비올렛 르뒥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서점주가 레즈비언인데, 그녀들은 자신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서점 비올렛 앤 코의 독특한 북 큐레이션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점 다큐를 하면서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그중에 <풀>은 읽지 못했다.


작년에 하비상 수상을 뉴스에서 접하고는 바로 샀지만 또 읽지 못하고 쌓아두었다. 그런 책들이 있다. 쉽게 손에 잡고 읽지 못하는 책.


 “‘풀’은 억압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인간이 트라우마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김금숙 작가의 수상소감


풀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던 이옥선 할머니의 이야기와 작가가 그녀를 인터뷰하며 다가서는 과정을 교차로 풀어내고 있다. 첫 페이지부터 강렬한 검은 풀, 중국 용정의 눈 내리는 풀밭이 펼쳐지고 끝에 작가인 소녀가 풀을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비유한다.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


마음이 무겁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와 ‘평화의 소녀상’ 등으로 위안부 문제에 앞장섰던 윤미향 씨가 정의 기억 연대 회계부정 등으로 2020년 논란이 됐었다. 논란으로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2020년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처 받고 버림받았던 살아있는 역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생애까지 그렇게 상처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 역사를 읽는 것 또한 쉽지 않아 자꾸 미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강렬한 그림체에 인터뷰를 하는 소녀의 머뭇거림이 무엇보다 만화로 풀어낸 이야기가 좋다.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소재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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